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용호 May 19. 2019

8. 누구보다 가슴 아플 그대에게.


 어릴 적에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살았던 집은 낡디 낡아 밖에 난 금이 안에까지 나버렸다. 그 사이로 항상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면 테이프를 이중삼중으로 붙였다. 가끔 20대 청춘들이 귀신 체험을 한다며 우리 집 골목에서 서성였다. 내가 말없이 그 골목에 들어가면 방금 꼬마 귀신이 지나갔다며 소리 지르곤 도망쳤다. 이래서 귀신을 안 믿는다.



 우리 가족이 소지한 대문 열쇠는 단 한 개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빠가 잃어버렸다. 새로 열쇠를 장만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칼로 문 따는 방법을 알려줬다. 우린 손재주가 있어서 금방 배웠고 나중에 열쇠로 문을 따는 것보다 빠른 경지에 이뤘다. 누나와 나는 항상 책가방에 부엌칼 한 자루 씩 넣고 다녔다. 하지만 아빠는 손재주가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빠는 잠긴 문을 외면한 채 벽을 타고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우리 집은 2층이었고 바닥에는 흙이 많았다. 아빠에게 그래도 좀 위험하지 않냐고 묻자 아빠는 금이 간 곳이 많아 벽을 타는 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가끔 누군가의 신고로 집에 경찰이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우리 집이 가난한 줄 몰랐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를 데리고 집에서 놀았다. 다음 날에 그 친구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고. 그 친구 덕분에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가난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부동산으로 재테크를 했었다. 엄마는 부동산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좋은 머리 하나 믿고 부동산에 덤볐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우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빵집에 일하러 가는 첫날에 엄마는 나를 불렀다. 그리고 한 이야기를 해줬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한 후, 집에 먹을 밥이 없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가 멀어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 돈조차 없어서 왕복 3시간을 걸어 다녔다.



 힘들게 살던 중 서울에 있는 엄마 친구가 집들이 초대를 했다. 엄마는 집들이를 갈지 말지를 한참 고민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없는 돈을 모아 선물을 사 갔다. 집들이가 끝나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실수로 누나의 젖병을 엄마 친구 집에 두고 와버렸다. 다시 그 집으로 갔다. 문이 열려 있어서 엄마는 조용히 젖병만 가져가려고 했다. 친구네 안방에서 친구 부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물이 이게 뭐냐고. 거지 같은 게 땀냄새 나서 죽는 줄 알았다고.



 안양에 살던 엄마는 그 무거운 선물을 들고 서울까지 걸어갔었다. 친구가 보고 싶었고 초대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하지만 이런 취급을 당했다. 엄마는 안양까지 집으로 걸으며 서러워 울었다. 아빠 등에 업힌 누나를 쓰다듬으며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엄마는 절대 가난하게 살지 말라고 했다. 돈을 벌면 어떻게 쓰든 상관없다고. 다만 절대 가난해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우리 아들이 돈도 벌기 시작했으니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 좋아했다. 그동안 고생한 엄마는 당연히 행복해져야 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으며 친구들과 커피점에서 수다를 떨었어야 했다. 가끔 남편에게 미운 동네 사람 욕도 한 번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어야 했다. 그러다 누나와 내가 결혼을 하고 출가하면 아빠와 단 둘이  신혼 분위기도 한 번 내면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가끔 손주들도 돌보면서 또 애를 키우냐며 좋은 마음 숨기고 싫은 척도 했어야 했다. 자식들과 손주들이 자라는 맛에 살다가 그렇게 행복의 넘쳐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병에 걸렸다.



 루게릭이란 병에.



 결혼식에서 초에 불을 붙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TV에서 호주만 나오면 나중에 아빠와 꼭 갈 거라고 했다. 루게릭병은 엄마의 미래마저 병들게 만들었다. 



 아빠에게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재혼하라고 울면서 말했다. 엄마에게 내일의 태양이 사라졌다.



 가장 힘들었을 우리 엄마.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당사자만 할까.



 엄마는 자존심이 세고 강한 여자였다. 그리고 총명했다. 항상 생각하지만 엄마의 머리는 못 따라갔다. 그런 사람이 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항상 우리를 휘어잡았는데 이제 일방적인 부탁을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우리는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런 모습에  엄마는 있는 잔소리 없는 잔소리를 해댔다. 우리가 고쳐 지길 바랬을 거다. 하지만 우리의 실수는 꾸준했다. 엄마의 잔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미소로 바뀌었다. 고통을 즐기기로 해버렸다.



 미안했다. 내가 키운 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늘은 창가에 앉아 멀리 보이는 노부부를 봤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다정하게 가고 있었다. 나는 남편하고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 많이 생각하는 건 우리 아이들 결혼할 때 해줄 일이 많은데 또 남편 옆에 빈자리가 생길까 봐 걱정이다. 촛불도 켜야 되는데 어떡하지?”

이전 07화 7. 고생 끝에 보는 미소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