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를 빨아서 물을 뚝뚝 흘리며 베란다로 나가는 아이를 보며 야단을 친다.
"물기를 빼놓았다가 널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느냐.” 고 베토벤 흉상만큼이나 인상을 썼다. 빨리 걸레 같다가 방바닥에 흘린 물기를 닦아 내라고 닦달을 해댔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그 아이를 찾는다. 전화받으랴 물기 훔쳐내랴.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 애가
“나는 신데렐라야.” 하고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졸지에 악명 높은 계모가 되었다. 제 언니는 막내를 부추기며 “유정아 우리가 구박하는 언니 됐다.” 하며 동화 속의 가족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렸을 때 엄마가 새엄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부모가 조금 심하게 나무라기만 해도 혹시? 하며, 제 마음이 서운할 때마다 새엄마 증후군에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 얘들도 가끔 `엄마는 계모 같아' 해놓고 내가 눈을 곱지 않게 뜨고 화를 내면 “농담 예요. 농-다암.” 하곤 한다. 어떻게 해서 계모 같다는 생각을 다할까 하며 머리를 갸웃거려 보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하고자 하는 것을 부모님께서 말리며 단단히 버릇을 가르치실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특히 버릇없는 행동을 했을 때는 종아리를 맞거나 손을 들고 벌을 설 때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요즘 아이들은 더 자주 계모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머리를 빗겨 줄 때 제 마음보다도 엄마 뜻대로 빗겨 놓았을 때. 당연히 버릇없는 행동을 보지 못하고 야단칠 때. 보고 듣는 것이 예전보다 더욱 많은 요즈음은 요구사항도 많아서 마음에 차지 않는 불만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다른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친엄마를 새엄마로 비치게 한 일이 있다. 엄마가 시장을 봐 오시면 콩나물을 다듬는다던가 저녁 쌀을 빡빡 문질러 씻어 놓는 일을 즐겨했다. 초등학교 5, 6학년인데도 이상하리 만치 그런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주위의 참새 아주머니들은 내가 전처 딸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을 한 모양이다. 오리지널 아빠 엄마의 고명딸인데.....
하루는 수돗가에서 쌀을 씻는 내게 옆방 아주머니가 살짝 물어본다.
“너희 엄마 새엄마니?” 한다. 나는 당연히
“아-뇨. 왜요?” 하고 되물었다.
“아니, 매일 쌀을 씻어 놓고 일을 하길래 혹시나 하고.”하며 말을 돌렸다.
내 딴엔 엄마를 도와 드린다고 한 일이 남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줄은 몰랐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은 쌀을 담가 놓으라는 부탁을 할래도 무척 힘들다. 엄마 몫인 일을 저희들한테 시킨다고 싫어하는 빛이다. 간혹 외출을 했다가 늦게 되어 전화로 간단한 일을 부탁하는데도 말문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좋아서 쌀을 씻고 콩나물을 다듬던 나의 어린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현실이다.
제가 물을 흘려 제 손으로 닦게 했다고 “나는 신데렐라다.”하고 외치는 애가 귀여우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없이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요즘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해 보고 성장해야 어른이 되어서도 힘이 덜 들지 않을까? 내가 어른이 되어서 별 무리 없이 종손의 맏며느리로서 큰 살림을 해내고 있는 것은, 그때 친엄마를 새엄마로 오해하게끔 만들며 일을 해보았던 솜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