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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신영 Apr 03. 2021

엄지발가락의 자유를 다시 꿈꾸며

애써 외면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때까지 기다렸다고 해야 할까?

아님 사는 게 바빠서 쓸 여유가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어쩌면 두려운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국에 나가기 전에 뵈었을 때 수필 쓰라고 당부하신 스승님 말씀도 있었지만, 엄두도 못 내고 이런저런 일로 인해 지쳐 있기도 한  두 달. 끄적 끄적이라는 표현이 맞을 글짓기를 흉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드디어 두어 달 뒤에 만난 스승님께서는

"몇 편 썼어? 꺼내봐요."

"머릿속에 있어요."

"나 같으면 매일 한 편씩 쓰겠는데 그걸 못 쓰다니."

게으른 글쓰기에 일침을 놓으시는 스승님은 뒤늦게 만난 고마우신 선생님이시다. 시인이지만 소설, 시나리오등 오랫동안 다방면으로 문예활동을 하고 계신 분인데 등단 후에 문단의 인맥을 쌓으라고 지인이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전업 주부로 바빴던 세월과 시어른을 모시고 살면서 문학 활동을 하기란 힘든 상황이었으며 서울과 부산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소식을 끊고 살다가 20년 만에 서울로 옮긴 후에 찾아뵙게 되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을 통 못 잔다는 내게

"잠이 올 때까지 글을 써요!"


그동안 메모했던 잡문을, 일기 등을 잠이 올 때까지 쓰다 보면 감각이 살아나겠지 기대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며 두 편 정도 메일을 보냈다.

"그래요, 자꾸 쓰다 보면 호흡도 깊어지고 내공이 쌓입니다. 뻬네로프의 실타래처럼 밤마다 풀어헤쳐 봐요. 브라보."를 문자로 외쳐 주신 스승님의 독려로 용기가 살아난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쓰고자 했던 열망도 사는 일에 바쁘다며 외면하고 살았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정말 할 일이 많았다.


이제 어느 정도 아이들도 제 자리 잡고 , 제 역할에 책임 있게 충실하다. 엄마를 단 한순간도  원망 않는 딸들이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두렵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글을 쓰게 되면서 자연히 이혼 얘기가 나올 것이며 어떻게든 살아 나온 과정이 그려질 텐데 혹여라도 딸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옛 기억이 떠올려져 상처가 덧 입혀질까 봐 염려되기도 하지만, 명절이나 휴가 때 모여 가끔 옛 얘기를 하게 되면 유쾌하게 나눠버리는 그네들을 보면서 이제는 못다 한 얘기를 써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써 내려가는 글들이 혹시 절통함에 치우쳐 자칫 여자의 한풀이처럼 , 행여 근사한 낱말들의 포장으로 이루어진 값싼 글이 될까 쉽게 끌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아는 사람들은 흔히

"자기 얘길 소설로 써도 될 거야."라고 쉽게 말들을 한다.

소설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닌 것을 최소한 아는 나로서는 대답을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고통의 세월을 알기나 할까?

내가 겪은 일을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라고 말하지 못할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당사자들은 깊은 상처로 인해 몇 년씩 힘든 삶을 살기도 하며, 그 상처로 인해 주눅이 들어 사는 가운데 더 큰 상처를 입는지도 모르며 살았다. 아픈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판단력이 흐려져 잘못된 선택으로 남은 인생을 힘들게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엄지발가락의 자유를 다시 꿈꾸는 것은 완전한 홀로서기라고 생각한다.

수년 전의 엄지발가락의 자유는 문학에 대한 그리움을 꿈으로 간직했던, 문학으로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한 작은 몸짓에 불과했다. 대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 내 마음의 글에 대한, 문학의 향기로움에 젖고자 하는 오랜 꿈의 열망으로 몸부림을 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완벽한 자유로운 홀로서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체격이 작아 아이들이 부르던 엄지공주에서 아직 머물러 아이들의 보살핌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몸이 약한 엄마를 걱정하는 딸들, 이제나 저제나 엄마가 예전처럼 글쓰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딸들. 엄마가 편하게 지내며 엄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원하는 딸들은 간절히 소망해 왔다. 자기들이 어렸을 때 글을 며 동인활동을 하고 동인지를 발간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엄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정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난 내가 딸들을 보살피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난 늘 딸들의 보호 속에서 있었음을 깨닫는다.


 예전에 남편이 결혼 직후부터 나를 길들이기 위해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어야 한다며 세뇌 아닌 세뇌를 시키며,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으로 돌리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울에서 학교 마칠 때까지 살아온 내가 남편 하나만 알고 부산이라는 곳에 시부모와 대학 다니는 시누이, 시동생 등 대가족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난 남편 말만 믿고 사는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 떨어트려졌을 때의 막막함. 암담함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초창기 시간들은 적응하며 눈치 보며 가족들에게 잘하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살면서 자유로운 영혼의 자신은 점점 사라지고 한 남자에게 길들여지고 며느리로 붙박이처럼 박혀 가족들의 수발을 들며 일만 하는 일꾼이 되어 있었다.


인격적인 자유를 갈망하며 실눈에서 눈망울이 점점 커지며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려 할 때 난 대책도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 사람의 지능 높은 간교든 책략이든 난 그에게 20년이 넘게 길들여져 세상의 잣대를 한치도 모르긴 여전했을 때이다. 그렇게 내동댕이쳐져 죽고 싶다를 입버릇처럼 뇌이며 살았다. 죽지 못해 산다고 못 볼 모습 보이기도 했다. 지독한 성장통을 앓아내는 엄마를 말없이 지켜보며 기다린 착한 내 딸들이 내겐 보석 그 이상이다.

지금도 걸핏하면 감기로, 몸살을 반복하는 내게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잘 모시진 못해도 그냥 함께 살자고 소박하게 말하는 딸들이다.


딸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늘 마음이 허전하다. 내 꿈은 무엇이지? 딸들이 제 갈길 다 가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자존심 강하고 자의식이 강했던 예전의 나로 서서히 돌아서고 있는 요즘. 말하고 싶은 것을 풀어내기 의한 고독한 싸움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어느 날은 지치고, 어느 한 날은 슬프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힘겨울 때도 있다. 하지만 곧추세워 일어나 내 갈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10년 전 그렇게 글쓰기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스승님은 걸핏하면 프랑스로 가셨고 난 서울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아이들 곁에 있다가 손녀들을 키워 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세월도 흐를만치 흘렀다. 코로나로 인해 스승님을 뵈올 수는 없지만 마음에 스승님을 두고 늘 글을 쓴다. 쓰는 글이 자신이 없을 때마다 야단맞을 것을 각오하고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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