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갈대도 만개를 서두르기 시작했는지 점점 탐스러워진다.
호젓한 국도를 달리며 그녀의 고백은 나의 가슴을 방망이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약간 달뜬 표정이 되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랑을 많이 했어요. 혼자서 가슴앓이를 해왔죠. 이민 가신다는 말에 저는 하늘이 다 노랬습니다. 정신이 아득했던 거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저는 행복합니다.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이 순간이 내 평생 제일 행복한 순간일 겁니다. 가슴이 아려왔어. 전화 저 너머로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나. 거부해야 하나.”
요즘 대한민국의 기혼 여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애인 신드롬에 빠져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다. 내 가까운 곳에서 애인 열풍에 휘말려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그녀가 안타깝게 여겨진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스캔들은 로맨스, 남에게 일어나는 스캔들은 불륜이라고 단정 짓는 현 세태에서 어떻게 될까.
몇 년을 두고서 혼자 사랑을 키워 왔다며 고백한 남성도 물론 혼자는 아니다. 사랑 없이 가정을 얼마든지 잘 꾸려나갈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진정한 사랑 없이 부부의 연으로 자식 때문에.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부부들이 많다고 한다. 새삼스레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며 할 말을 잊는다.
그녀의 마음이 허술하게 열려 있어 남편 아닌 다른 남자가 비집고 들어오게 된 데에는 그녀의 남편이 빌미를 제공했다. 누구나 일백 프로의 내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지난봄에 둘은 산성으로 나들이를 갔다. 다른 부부들처럼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적은 그들은 오랜만에 봄의 정취를 만끽하며 진지한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산성막걸리에 적당히 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그녀로서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당신은 죽을 때 누구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그녀는 당연히 `내 곁에서 내 손을 잡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겠지?' 하면서 은근슬쩍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소리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ㅇㅇ곁에서 죽고 싶어.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 간절해.”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남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나와의 결혼 때문에 그 애가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여자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진 여자다.
“오래전에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 친구 만난다고 나갔다 온 적 있었지? 그때 걔 만났어.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만나고 왔어.”
가을이 되면 단풍을 보러 가자, 낙엽을 밟으러 가자고 졸라대던 그녀였다. 올봄부터 `애인' 타령을 해대더니 그래서였나? 올 가을엔 애인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듯 입을 앙 다물더니 어느새 다른 남자의 고백까지 받고서 행복에 겨워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불안하다.
며칠 후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의를 해와 따라나섰다. 나는 그녀의 변화를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별일 없이 잘 지내느냐고 묻는다.
“응 잘 지내고 있어. 애들 유학 준비에 바쁘기도 하고.”
여간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그녀가
“요새는 감시하는 사람이 둘이나 돼.”
“......”
“더 이상 어떻게 하겠어? 서로 지켜보는 거야. 문제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문제가 생기는 거고.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 사람도 가정에 충실하고, 내가 `된다 안된다'를 말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위치에 대해서 잘 알고, 빗나가지 않을 것을 확신해. 그 사람의 지성을 믿는 거지. 든든한 친구라고 생각할래. 그리고 날이 갈수록 남편이 그리워. 전화 목소리에 눈물이 흘러내려. 그동안 몰랐었어. 내가 남편을 진정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어. 도착할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보고 싶어 미치겠어.”
“그래. 잘 됐어. 다행이다. 남편이 했던 말은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좋아 지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죄의식에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선택된 사람은 자기였잖아? 남편의 생각도 존중해 줘야 하는 아량도 있어야지.”
젊고 순수했던 시절에 좋아한 여자. 자신 때문에 약을 먹고 죽으려 했던 여자이기에 일말의 죄책감에 시달렸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하면 할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좋단다.
가을을 앓고 더욱 성숙된 사랑을 품게 된 그녀의 어깨 위에 가을이 내리고 있다. 시리도록 투명한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그녀가 우울했던 감정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밝게 웃어서 좋다. 남편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말없는 박수를 보낸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