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상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신영 Sep 18. 2023

비 오는 저녁 산책을 하며

이 생각 저 생각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9월이라고 가을이 왔다며 아침저녁 선선하다고들 말을 하지만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모두가 지친다.

조금은 서늘해지기를 간절히 원해 본다. 물론 한낮의 따끈따끈한 햇살이 오곡백과가 무르익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하는 말을 해보지만, 일을 하면서 땀을 워낙 많이 흐르기에 동료들조차도 이번 비가 지나가면 기온이 좀 내려갈까? 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휴일마다 한두 가지 반찬을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삼 일 전 휴무에는 땅콩 넣은 모둠 콩조림을 만들고, 김치도 담그고 남은 부추에 낙지를 넣고 지짐도 부쳤다. 사다 놓은 레몬을 썰어 레몬청도 만들었다. 숙성이 되고 나면 따듯하게 달콤하고 새콤한 레몬차를 마실 일을 그려보면서...

오전에 알바를 시작한 지 삼 개월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생겨 오전 일감을 찾던 중에, 집에서 5분 거리에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할 곳이 있어 시작했다. 일이 많을 때면 12시 반까지, 적으면 10시까지, 보통은 11시경에 마친다.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급은 얼마 되지 않아도 여유가 있어 괜히 즐겁다. 일을 하고 돌아와 얼른 점심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는데 힘든 일은 아니지만 시간에 쫓겨 여유가 없다. 일요일만 쉬기 때문에 회사의 휴무일엔 오전에 일을 하고 돌아와 늘치가 난 몸을 조금 쉬어 주고 밑반찬도 만들고 못 만났던 친구도 만나고 한다. 그러다 보니  조금 피폐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오늘은 친구와 점심도 먹고 영화 한 편 보자고 얘기도 나눴지만 비도 오고 감기 기운이 있다면서 다음으로 미뤘다.

여름 들어 매월 감기를 하고 있어서 오늘은 꼼짝 말자 마음먹었지만 몸도 웬만해서 며칠 전에 회사의 동생이 손질된 멸치를 가방에 넣어 둔 것을 집에 와서야 알았는데 그 멸치를 꽈리고추와 마늘을 넣어 조림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늦었지만 남대문 시장에 나갔다. 필요한 액세서리 부속을 사고 동대문시장으로 다시 향했다. 요즘 유행하는 제품들은 무엇인지 대략 훑어보고 들어 오는데 어느새 퇴근으로 지하철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남대문의 재료상 사장이 나를 보더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어?"

"말랐어? 여름에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가? 매일 보는 나는 날 잘 모르겠어."

"응, 너무 말랐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냐, 아픈데 없어. 여러 가지 사고가 있긴 했어. 오전에 일도 하고..."

"다음에 만나 얘기 좀 하자."

"알았어. 다음에 봐."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다 봐."

친구들은

"너 같은 똑순이가?"라고 하지만 난 헛 똑똑이고 허당이다.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의심할 줄 몰라서 20년 넘게 살았던 남편에게도 속았고 그 후로 평탄한 길을 걷진 못했어도 이번처럼 힘든 나날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이 탓이겠지 젊은 나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많이 평정을 되찾았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편하다고 할까?. 이처럼 비 오는 저녁 탄천이 부르는 것 같아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말이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들은 안 보인다. 비에 젖은 풀들로 벌레들도 숨었는지 조용하다. 늦은 밤에 혼자 나가지 말라고 해서 초저녁에 별로 걱정도 않고 동네니까 타박타박 걸어 본다. 걷다 보니 우산을 쓴 부부도 걷고 혼자서 열심히 운동하는 분도 보인다.

가로등 불빛은 말없이 거리를 비추고 우산에 또독 또도독 떨어지는 빗소리. 빗물에 반짝이는 길 위에 떨어진 나뭇잎은 그림 같다. 저 멀리 탄천의 물결은 빗물과 함께 화음을 맞춰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려 한참을 바라본다.

고라니는 어디 갔을까?

비 오는 이 시간 어디서 지내고 있을까?

한두 번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으나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들도 이 저녁 잠자리를 살피고 어디선가 잠을 청하려 하겠지?

이젠 멀리서 날라 올 오리들로 채워질 강물이 기다려진다.

백로 부인들과 왜가리도 그동안 잘 지내고 있겠지. 허수아비처럼 커다란 날개를 펴고 일광욕을 하던 민물가마우지들은 그대로 있을까? 이른 아침 해뜨기 전에 걷고 싶고, 조용한 한낮에도 탄천의 풍경을 바라보며 걷고 싶어 진다.

곧 그럴 날이 올 거야.

씨앗을 알알이 옹골차게 품고 있는 해바라기는 무거운지 고개를 숙여 고요히 밤을 맞고 있다.

잠시 걸으며 마음은 더욱 안정이 되고 언제나 말없이 변화하는 계절 속에서 누구라도 거부하지 않고 맞아주는 이곳이 마냥 좋다.

조금은 쓸쓸하고 허허로운 감정이 올라올 듯하지만 애써 누른다. 지금은 그런 감정도 사치다. 무조건 열심히 살아내야만 하기에 이내 다잡는 마음으로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본다.

초저녁이어서인지 비가 내려도 어둡지 않고 흘러가는 흰구름과 하늘이  보인다.

곧 비가 그칠 모양이다.

지금 내겐 고난의 길이겠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비가 그치면 맑게 개인 하늘이 오듯이, 또 좋아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오기에 내겐 즐거운 일만 있으리라 믿는다.(2023,09,13)

*photo by young.


매거진의 이전글 밤의 탄천길을 걸으며 드는 생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