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휴양림에서

by 안신영

천년 고찰 화엄사를 돌아보고 우리는 온통산수유나무가 가로수인 길을 따라 차는 천천히 숙소인 산수유 휴양림으로 들어섰다.

이쪽을 봐도 산수유, 저쪽을 봐도 산수유였다. 노란 꽃이 사라진 계절임에도, 산수유나무들은 여전히 이 고장이 어떤 곳인지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산수유 가로수가 이어진 언덕을 오르자 우리가 묵을 휴양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도 곱다. 두루미꽃.

언덕 아래로는 호수처럼 고요한 저수지가 내려다보였고, 그 너머로 낮게 몸을 숨긴 마을이 있었다. 밤이 되면 그 마을의 불빛이 별처럼 흩뿌려질 터였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는데도, 이미 아름다울 것을 예감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휴양림 옆에는 구례 수목원이 이웃하고 있었다. 울창한 삼나무 숲에 들어서자 저절로 고개가 젖혀졌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앞에서 사람은 언제나 작아진다. 가을이라 꽃은 거의 없었지만, 나무들은 충분했다. 말없이 서서 반겨주는 나무들, 그리고 간혹 철 지난 철쭉 하나가 헤설프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쓸쓸해 보여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다음 봄에 다시 올게.

밤이 깊어지자 숙소는 도시의 소음과 완전히 단절된 섬처럼 느껴져
별과 달이 은은한 빛으로 내려다보는 그곳은, 마치 먼 길 온 나그네를 알아보고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동안 고생했지. 오늘 밤은 편히 쉬다 가렴.'

맑은 공기 청청의 숲 속에서 잠도 잘 오련마는 너무 설레어서인지 잠은 쉽게 들지 못했다. 뒤척이다가 결국 이른 아침, 산책에 나섰다.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수지를 바라보며 문득 어제 보이던 오리들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그들은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을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물 위는 고요했고, 오리들은 아직 꿈나라에 머무는 듯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어젯밤 별처럼 반짝이던 마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마을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졌고, 나는 어느새 목적지보다 나무에 더 마음을 빼앗긴 채 한참을 내려가고 있었다.
쓸쓸한 빛으로 물든 나뭇잎들. 하지만 그 속에서 겨울나무들은 이미 내년 봄을 준비하며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이쯤이면 충분하겠다 싶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오르는 길이 아침 공기처럼 가벼웠다. 숨은 조금 찼지만 마음은 오히려 맑아졌다.

숙소로 돌아오니 글벗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샐러드로 푸짐하게 차려진 아침 식탁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걸음과 생각을 풀어놓았다. 더 자주, 이렇게 함께 걷는 여행이기를 바라면서.

여행은 결국 이런 순간들로 완성되는 것 같다. 풍경을 걷고, 마음을 나누고, 서두르지 않는 아침을 보내는 일. 그렇게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 말이다.

*photo by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