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 하룻밤 새에 다 져 버렸네.
밤엔 별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났어. 아주 커다란 나무에서
수천수만 송이의 하얀 꽃, 무슨 꽃일까?"
말로만 전해 듣고 오래전에 산에 올랐다 만난 그 꽃일 거라는 확신을 해 본다.
딱 이 계절이었으니...
부산에 있을 때 성훈이 엄마와 가끔 오르던 배산에 올랐다가 만난 나무.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한 커다란 나무 전체에 수없이 피어나 덮고 있는 하얀 꽃에서 흐르는 은은한 향에 취할 것만 같았지. 돌아와 나무 사전에서 찾아 "야광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이를 먹었나? 20여 년 전의 그 야광이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고 형광 나무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확실히 알기 위해 형광 나무로 검색을 하니 그 하얀 꽃과 나무는 그림자도 없었고, 다른 숱한, 필요 없는 것들만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하루가 지나고 퇴근길에 번쩍 전구 불빛이 들어오듯 "야광나무"다 라고 혼잣말로 되뇌며 바로 검색하니 바로 어제 본 영락없는 그 나무였다. 검색하지 않아도 내 기억 속의 야광나무가 단어 하나 형광으로 뒤 바뀌어 그에게 바로 답해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렇듯 꽃과 나무, 풀꽃의 이름조차 누가 물어보았을 때에 바로 답해 주지 못하면 난 갑갑하다. 신경질 나려고 한다.
그가 샹송으로 묶인 노래를 들으며 그리스, 이태리, 에스파냐, 아랍어, 하물며 독일어까지 알아차린다. 온갖 언어의 노래가 나온다고 신기해하며 좋아하다가도 모르는 언어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건 어느 나라 말이지? 아 - 약 올라. 신경질 나. 뜻을 알 수 없는 언어가 나오면 난 약 올라."
나는 길을 거 날다, 아까시꽃이 피었네. 소나무에 송화가 피는구나 하며 박목월의 '윤사월' 詩가 생각나서 좋다. 지금쯤 제법 흰꽃 잎 네 장이 마치 십자가 모양으로 피어나 인상적인 산딸나무 꽃이 한창이겠네. 메타스콰이어의 연둣빛 세순이 고운빛으로 물들며 그 큰 키를 하늘로 뻗고 있을 때 모르는 나무가 한 그루 나타나면 그 이름 모르는 나무 때문에 난 속상해하지.
산길을 걷다가
"저건 뭐야?"
"저건 나도 들깨 풀꽃이야."
"저 길쭉한 저건 나리야?"
"아니 원추리. 나리는 백합과 비슷해서 잎사귀 대궁 모두 생김새가 달라요."
라고 바로 대답해 줄 수 있으면 난 기분이 좋고, 이름 모를 나무와 꽃이면 나도 약 올라.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신경질이 샘솟는다구요. 그와 나, 전혀 다른데 참 닮은 구석도 가끔은 있다라며 신기해한다.
능수버들, 능수벚나무가 제법 많은 강변길을 드라이브하며
"놀랍네, 여기 능수벚이 참 많네. 벚꽃이 한 창일 때 정말 예뻤겠다"
그 풍경을 보지 못하고 비껴간 시간들이 아쉬워, 아쉬워 축축 늘어진 벚나무 가지를 바라본다. 차창 뒤로 달아나는 벚나무를 고개를 아프게 돌리면서까지 오래도록 보고 또 바라본다.
산에는 벌써 여름이 물들어 짙은 초록과 연초록의 향연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오는데 그대와 난 언제까지 가고 올 수 있을까? 예정에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횡재한 듯 그대가 반가워서 달뜨는 마음으로 잠도 이루지 못하지. 이내 잠드는 시간이 아까운 거지. 무한 얘기하며 와인을 기울이며 밤을 지새우고 싶을 뿐이지.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면서도 이렇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대를 바라보라고 수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지내게 된 것일까?
이제야 비로소 그대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어서 만남이 허락된 것인가?
늦은 만남을 안타까워하며 더욱 많이 사랑하라고?
하지만 헛된 바람인 것을 알기에 어쩌다 운이 좋아 만나면 그 시간 충실할 뿐이지.
*야광나무 꽃
*산딸나무 꽃
*가운데 딸기처럼 생긴 열매가 꽃잎 지고 나면 빨갛게 익음.
* 요즘 한창 피어난 이팝나무 꽃. 먼 데서 바라보면 하얀 눈을 나무 전체에 이고 있는 듯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