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약사. 그즈음 은퇴하신 사회학 교수님, 교회 플로리스트, 인사동 골동품 사장님, 여행사 오너, 퓨전음식점 대표 등 헤어지기 섭섭해서 꼭 그만둬야 하냐고 몇 번씩 묻던 분들이다. 나 자신 글쓰기 마음을 다 잡으려고
"실은 쉬면서 중단했던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했더니
"그래, 오래 있을 사람으로는 안 봤어." 하신 분은 성전 꽃꽂이하시는 교회 플로리스트이신 장로님. 연세 80이 넘으셨는데도 아주 정정하시고 활력이 넘치는 분이시고 늦은 저녁에 오셔서 꼭 찜질방 불가마에서 한증을 하시고 목욕을 하시는 분인데 싱긋 웃으며
"선녀들과의 인연"을 꼭 쓰라며 헤어질 때 제목부터 말씀해 주셨다. 왜 선녀지? '나무꾼과 선녀'가 생각나서 혼자 속으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연세대학교 옆에서 퓨전 식당을 하는 회원은 같은 종씨라서 더욱 반가웠는데 난 23대손, 그녀는 26대 손이라 했다. 나이가 두 살 어리다며 언니네? 하며 웃더니 영주에 있는 선비촌에 가봤냐고 묻는다. 갔었지 거기서 문성공, 회헌 안향安珦할아버지 영정을 뵙고 왔다. 그녀는 어릴 때 할아버지 손잡고 자주 다녀왔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그만둔다는 얘기에 못내 아쉬웠는지 어느 날 점심을 포장해 왔다. 전화로 점심 먹었느냐 묻길래
"나 요즘 치과 치료 때문에 죽 먹고 있어."
" 왜? 죽 먹고 어떻게 일을 해? 조금만 기다려 점심 만들어 갈게." 하고 끊는다.
응? 뭐지? 맨날 바쁘다고 했던 그녀. 바쁜 사람이 무슨 남의 점심을 해오겠다는 거야?
얼마 후 숨이 턱에 닿을 듯하며 와서는
"뜨거울 때 얼른 드셔. 나 간다. 나중에 봐."하고 사라졌다.
포장에 손을 대니 따끈따끈하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까탈스럽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 친혈육 이상으로 마음을 써주니 너무 고맙고 목이 메어 왔다.
숙주를 넣은 가락국수 볶음이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 치과 진료받는다는 소릴 듣고 먹기 쉬운 음식을 해온 모양이다. 그때서야 카톡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보니 레스토랑에 앉아 찍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사장님이었구나...
그녀도 저녁 늦은 밤 그룹인데 저녁에 왔길래
"맛있게 잘 먹었다는 보낸 카톡에 대답이 없어서 안 오는 줄 알았어." 했더니
"언니가 금방 안 나오게 될까 봐 마음이 급했어."
밥 한번 꼭 대접하고 싶었다는 그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꼭 선물을 이렇게 주지 않아도 마음을 써주고 생각해 주는 속 깊은 사람, 그것으로 나는 족한데 선물까지 주는 사람들.
이렇듯 마음이 예쁜 사람도 많다.
교수님 또한 그에 속한다.
그즈음 사우나에는 처음 일을 시작했을 연초보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할 일은 많이 줄어 있었다. 매점에 무료하니 앉아 있기 싫어서 책도 갖다 놓고 틈틈이 독서를 하고 있는 내게 무슨 책이냐며 관심을 보였는데, 읽고 있는 미학 오디세이 1을 보더니 재밌냐고 물어본다.
"재밌어요? 진중권 씨네요?"
"네, 원시예술부터 현대 예술까지 얘기인 것 같아요. 3권까지 있는 책인데 재밌네요."
"3권요? 아, 저도 그림 좋아해요. 읽어 봐야겠네요." 하며 미소 짓는다.
바쁜 분 같았는데 그날은 시간이 좀 여유가 있는지 본인 얘기를 해줬다. 나이를 묻더니 동갑이라면서 곧 퇴직하고 프랑스에 있는 딸에게 가서 딸이 아기를 낳으면 키워 줄 거라고 한다. 나도 손녀 3년 키워주고 너무 심심해서 일을 찾다가 이곳에 왔다 하니 그분은 조금 안타까워 하긴 했다.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고, 이 일과 안 어울리세요. 하며 소리 없이 웃는다. 난 그분이 좋았다. 늘 조용하고 사람을 대하는데 차별이 없어서 좋았다.
먼저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목소리 큰 사람들이 많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것도 좋지만, 사우나에서 벌거벗고 다니며 할 일 못 할 일 구분 못해 눈살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 때문에, 이런 분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바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면서도 언제나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떡 하나를 챙겨 갖다 주면서도
"이거 조카네 아이 돌 떡인데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좋아하시려나?" 이러면서 건네준다.
이런 분께 나는 나의 특기인 핸드메이드 제품을 하나씩 선물했다. 제일 먼저 목욕 다니면서 필요한 방수원단 파우치 세트를 먼저 했고, 여름엔 조용하고 예쁘장한 모습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담수진주와 로드 나이트 원석(핑크 계열)을 섞어 만든 팔찌를, 헤어질 땐 크리스털로 만든 마스크 줄로 서운함을 대신했다.
"제가 좋아하는 색깔이에요. 예뻐라, 제가 해도 돼요?"하고 되묻는다.
"좋아해 주시고 잘 사용하시면 그것으로 됩니다~"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교수님이 나에게 준 선물도 많다. 책을 좋아하는 내게 어울린다며 자신의 출간 책인 "그림으로 여성을 읽다"를 선물했다. 다 읽어 보고서 딸들에게 한 권씩 주려고 주문해서 그분께 직접 사인을 받아 선물했다. 많이 고마워했다. 또 기능장 명인이 만든 유네스코 건물 그림이 찍힌 나무쟁반과 가을에 하고 다니라고 수직 머플러를 주셨다. 난 쓰레기 된다고 포장 안 하는 주의라서 내가 만든 물건이라 그냥 손에 들려주는 방식인데 그분은 꼭 포장지로 포장하고 노끈으로 묶어서 제대로 선물을 주셨다.
종합병원에서 약사를 하셨다는 70 중반 어르신은 우리에게 참 친절하셨다. 자주 과일, 요구르트, 초콜릿들을 책상 위에 주며 수고가 많다고 하시고, 미화 담당 언니 휴무날인 수요일은 한 달에 두 번 혼자 근무하는데.
"오늘 혼자 고생이 많죠? 심심할 때 이거 먹으면서 일해요." 하며 초콜릿을 잘 주셨다
그분은 어느 날 혹시 임영웅 노래를 영상으로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 당시 트로트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였는데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 임영웅 노래 20곡을 외우기로 스스로 도전을 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노래 외우기는 치매예방에도 좋다면서.
"난 가곡과 클래식밖에 몰랐는데 이거 너무 재밌어서 요즘 이거 보는 재미에 살아요." 하신다. 유튜브에서 노랠 찾아 나지막하게 들려 드리니 정말 좋아하시고 혹시 가사를 적어 줄 수 있냐? 본인 핸드폰으로는 귀찮기도 하고 새로 배우려니 못하겠다며 부탁해도 되냐고 물으신다. 얼마든지 해드린다며 목욕하고 나오세요 했다.
나중에 가사를 적은 종이를 보시더니 "자기 공무원 출신이야? 필체가 아주 좋아" 물으신다.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과찬이십니다. 또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또 해드릴게요.
그분은 대학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할 때 만난 의사 선생님과의 러브스토리도 간간히 들려주시면서 그 뒤로 몇 번 더 부탁하셨고 나는 적어 드렸다.'대중가요 가사가 좋은 게 많더라. 어떤 것은 시 같다' 하시길래 내가 좋아하는 조용필 오빠의 정말 시 같은 <바람이 전하는 말>, <그 겨울의 찻집>을 따로 적어 드렸다. 가사적은 종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갖고 다니며 욕탕에 들어갈 때도 갖고 들어가 수시로 연습하셨다. 보기 좋았다.
흔히들 말하는 부잣집 사모님이신데도 목욕용품도 간단하다. 때밀이 대에 누워서 때를 민적도 없고 샤워타월 비누, 샴푸 기본만 들고 다니신다. 얼굴과 몸에 치덕치덕 바르는 일도 없으시다. 누군가가 '언니 그 옷 예쁘다. 어디서 샀어?' 그러면 '우리 동네 양품점, 아니면 남대문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으로 색깔별로 사놓고 입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부자라도 거드름 피우지 않고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것이 눈에 띈다. 참 좋은 모습이다.
사직서를 낸 나에게 '자기 여기 못 나가. 올 사람 없어. 그냥 있게 될 거야.' 하며 최면 거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셨다.
한정식집을 따님과 함께 운영하시는 어머님 한 분은 저녁에 식당일 다 마치고 오시는데, 여름엔 수박을 깍둑설 기해서 담은 통을 주시며, 시원할 때 먹으라며 웃으신다. 금요일마다 찜질방에서 주무시고 토요일 아침에 댁으로 가신다며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까지는 늘 그렇게 하셨다, 군고구마, 찐 옥수수, 직접 갈아 만드신 과일 주스 등을 때때로 갖다 주셨다. 난 고마움에 불가마에 들어가실 때 시원하게 드실 얼음물을 만들어 한 통씩 드린다. 가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하시면 내가 사드린다. 나가실 때 계산대 앞에 서 계시면'제가 했어요'한다.'왜 그랬어.' 하시면서도 좋으신가 보다. 이분께도 파우치와 마스크, 마스크 줄을 만들어 선물했고 헤어질 땐 눈물이 났다. 청주에서 살고 계시는 우리 막내 고모 같아서 참 좋아했는데...
이처럼 세상엔 좋은 분들이 많이 숨어 계신다.
우유, 두유, 비타민 음료, 핸드크림, 원두커피, 과일, 햅쌀까지도 선물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인가를 자꾸 갖다 주어서 좋은 분들이 아니고 역지사지를 아시는 분들 같아서 좋았다. 한 가지를 베풀고 나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 좋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마음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선물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좋아할까? 저것을 좋아할까? 더 좋은 것으로 하고 싶어 시간을 들여 고르게 된다.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든 물건엔 의미가 담겨 있고 뜻이 있게 된다. 물건을 고를 때부터 이미 마음이 그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만드는 파우치, 마스크, 마스크 줄 등도 이것이 받을 사람에게 가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것인지 생각하게 되고, 색상이며 모양이 그 사람에게 어울릴 것 인지도 상상을 하며 만든다. 그분은 받으면서 좋아할까? 혹시 쓸데없는 선물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보통 사람들은 다 좋아해 준다.
꼭 필요한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이런 분들이 계셔서 피곤해서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마음이었다가 위안이 되고 다시 온몸에 힘을 채우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나름 살만한 것인가 보다.
사우나를 나오는 날까지 나는 우유 한 개라도 사준 분들에게 다들 예쁘다고 좋아라 하는 크리스털 마스크 줄을 선물하며 그동안 베풀어주신 마음씀에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