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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J CllWOO Mar 16. 2017

내 삶의 패턴을 읽다.

나에게 있는 근본적이고도 공식 같은 패턴을 알게 되었다. 목표가 세팅되지 않은 곳에서 나는 깊은 침묵에 빠진다. 목표를 이루고 나면, 다시 공허해지는 상태가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첫 번째 표면적 습인 듯하다. 회사 안에서 목표를 찾아보았지만 결국 그 목표를 찾지 못해 마음이 떠났다. 목표를 찾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회사에서 나를 개발한다는 행위가 유리천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한계로 단단히 억눌려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핑계 같지만, 나는 그 핑계를 쓰고 싶다.


난 월급을 받으면서도,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었다. 월급을 디폴트라 생각하는 병이 있는 것 같다. 돈에 대한 개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꾸준히 일정하게 나오는 보상을 보상이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고 본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했을 때 이전 상태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것, 그 상황만이 나에게는 적절한 보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보고 영업직이나 성과위주의 부서로 가면 그 소리 못할 것이라고 한다. 충분히 당연하고 일침 있는 조언이라 생각하면서도 머리와 온몸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꾸준한 급여를 열심히 해서 얻을 수 있는 보람으로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 이것이 내 사고가 고장 나고, 잘못된 판단인지.. 나의 고유한 성향인지에 대해서는 후자라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유리벽은 현재 하는 업무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살고 싶은 것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떳떳하고 싶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럽고 싶다. 나는 내 연봉만큼 내 자존감을 잃었다. 지금의 업무와, 의지, 현실 , 겪어온 부조리 등으로 인해 어쩌면 나만의 유리벽을 치고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나는 내 목소리의 크기만큼 얘기를 못하게 되었을까. 내 가능성이 이러한 개인적 유리벽으로 인하여

한계 되거나, 갇혀있다는 것이 머리로 이해될 때 나는 그곳에서 목표를 찾기보다 더 큰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가능성을 쫓는 행위는 실패와 성공을 둘 다 품고 있고, 그 가능성을 쫓는 행위는 나를 자꾸 새로운 것들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런데,
'새로운 것들을 못해낼 이유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날 때마다 내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사실 수박 겉핥기만 해 놓고선 그 가능성을 판단하는 거라 일단 될 것 같으면 쉽게 덤빈다. 하지만 호기롭게 추진하다 보면 결코 쉽게 거저먹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또 가능성이 막혀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유리천장을 깨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다시 가능성이 있을 법해 보이는 것들의 문을 두드린다.


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찾아다니는 습...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지만 안 풀렸을 때의 리스크 테이킹에 대해서는 쉽게 무너지는 타입.

그게 지금의 내 삶의 습이다.


여기서 나는 유념해야 될 점이 여러 개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유리벽에 대한 고정관념과 머리로만 이해하고 움직인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표라는 것에 대한 정의 이렇게 3가지의 모호한 정의로 인해 이 패턴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무한반복 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첫째. 유리벽에 대한 고정관념

이는 그 누구도 정한 것이 아닌, 나의 주관으로 정한 정신적 한계선이다. 이 유리벽을 극복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다. 유리벽을 깬다는 것은 두려움을 않고 서도 트라우마와 맞서 싸우며, 나의 부족한 부분이 메워진 새로운 사람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유리벽을 깬다 라는 것은 살면서 몇 번 오지 않는 삶의 변곡점과도 같다고 믿는다. 그때는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나는 살면서 이러한 변곡점을 두 번 정도 겪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회사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두 번째. 이러한 전체의 기조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움직인다는 점이다.
아직 성숙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경험이든 인간적인 성숙도든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로 이해하는 행위에 빠져서 생각에 생각을 무는 행위는 엄청난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시킨다. 이럴 땐 차라리 해보고 싶었던 일을 저지르는 게 건강에도 좋고 심리적으로도 속 시원하며, 결과론적으로도 생각지 않았던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과를 얻기 이전이 상대적으로 너무 다운되어 있었기에 작은 변화에도 큰 힐링을 느껴서였던 것 같다.


세 번째. 목표라는 것에 대한 정의이다.
그럼 과연 내가 그토록 항상 가지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내가 30대가 된 지금까지 꼭 바라왔던 바람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0대: 나만의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10대: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주세요.
10대: 엄마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10대: 내 외로움을 채워줄 방법을 알려주세요
10대: 꼭 서울로 대학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10대의 바람은 누군가에게 기도하듯이 바랬었던 것 같다.

그때의 바람을 적으려니 전부 해주세요 톤으로 적게 되었다.

그렇다면 20대의 바람은 무엇일까.


20대 :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
20대 : 과정이 중요하다.
20대 : 누군가를 대표하고 싶다.
20대 :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다.
20대 : 공무원에 합격되었으면 좋겠다.
20대 : 그냥 남들처럼 내가 한 일만큼 월급 주는 실속 있는 회사의 직장인이 되고 싶다.
20대 : 맞은편 대기업 같은 큰 기업으로 가고 싶다. 작은 기업 작은 일을 벗어나고 싶다.
20대 :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꼭 입사하고 싶다. 제발
20대 : 도살장에 소가 끌려갈 때의 기분을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꼈다. 이 상황을 제발 벗어나고 싶다.


20대는 다이내믹했다. 흘러가는 곳들에서 느낀 바를 항상 다음 행동으로 옮겼던 것 같다. 다양한 경험과 과정을 미덕이라고 여겼고, 그런 와중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잭팟이 터져서 정말 운이 좋게도 현실적 조건이 좋은 회사에 입사를 하였다. 입사하고 나서, 나에게는 사수가 회사로 느껴졌고 사수와의 갈등으로 인하여 트라우마가 생겼고, 나는 회사 전체에 등을 돌렸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도망가고 싶었다. 이러한 바람을 다음의 움직임에 반영시켜 30대에 들어왔다


30대 : 적성을 찾고 싶다.
30대 : 나만의 일을 하고 싶다.
30대 : 전문가가 되고 싶다.
30대 : 프로그래밍을 잘하고 싶다.
30대 :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30대 : 디제이가 되고 싶다.
30대 : 월간 클럽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
30대 : 나라는 사람을 각인시키고 싶다.


30대에 들어와서는 전부 '싶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30대의 바람들은 지금도 전부 현재 진행형이다. 20대가 어떠한 물리적 골이 목표되어져 있었다면, 30대의 목표 설정은 앞으로 내 인생 전체에 대한 목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곧 결혼할 좋은 사람이 있다. 그 여자와는 정말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 애기가 생기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바뀐다고들 한다. 내 가족에게 떳떳하게 일하는 아빠,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한 톤으로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모습은 절대로 계속 유지하고 싶지 않다.


결혼을 얼마 앞두지 않았고, 가족계획이 어느 정도 생각되어져 있는 만큼 그전까지 나다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더 조급한 것 같기도 하다. 10대 ~ 30대에 이르는 내 인생의 목표들을 나열해 보니 나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겼었는데 나의 바람들은 누구나가 바라는 범주 안에 있음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특별함은 목표의 설정이 아니라, 그 목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당장의 목표의 결핍이 문제라면 남들이 생각하는 뻔한 목표를 하나 골라서 세팅하고,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특별한 나'를 마주하는 것이 지금의 혼란을 해쳐나가는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그 답을 얻으려는 과정은 정해져 있지 않기에 특별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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