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배낭의 변명

겁이 많아서 그래요.

by 하로동선



10년 전만 해도 산에서 100리터급 대형 배낭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어지간한 냉장고만한 배낭을 메고 줄줄이 산길을 걷는 모습은, 작은 배낭에 물 한 병 김밥 한 줄 넣어서 산에 온 사람들 눈에 경외의 대상이었다. 힘든 산행에서 작은 배낭도 버거운데, 머리 위로 올라오는 커다란 배낭을 멘 사람은 뭔가 나와 달라 보이고, 많은 경험과 능력을 지닌 전문 등산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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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우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리산을 오르는 건 운동이 아니라 중노동이다. 특히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제 체력만 믿고 그런 배낭을 메고 산을 다니면 몸이 견디지 못한다. 그전에, 무게에 질려서 산이 싫어진다. 그래서 배낭에 최소한의 장비만을 넣고 나머지는 가벼운 옷이나 침낭으로 부풀려 다닌다. 그렇게 덩치만 크고 가벼운 배낭을 우리는 '뽕배낭'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더 낮은 산을 찾다가, 산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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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은 무게와의 싸움이다.

중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적은 무거운 배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가볍고 간단한 배낭을 메려고 한다. 무게를 줄이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그런 노하우를 잘 아는 사람이 고수로 인정받는다. 1Kg을 줄이는데 100만 원을 썼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은 BPL(Backpacking Light)이 대세라 30리터나 40리터 배낭에 1박 2일 장비를 꾸려서 산행에 나서는 사람들이 흔하다. 경량의 장비와 최소한의 물품만을 휴대하여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그런데 내 배낭은 아직도 크고 무겁다. 당일에는 50리터, 1박 이상의 산행이면 80리터 배낭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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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오래되면 본능이 된다. 산에 가는 날이면 새벽에 눈이 뜨이고, 배낭을 꾸리는 일은 샤워하고 옷을 입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다. 맨 아래 바닥에는 비상용 여름침낭이나 보온의류를 넣고, 그 위에는 자질구레하고 별 쓰임이 없지만 꼭 챙겨야 할 것들이 파우치에 담겨 들어간다. 버너, 코펠, 부식은 맨 위에 놓이고 렌턴, 장갑, 버프, 비상약품은 배낭 헤드에 챙긴다. 말로 하면 간단한데, 천성이 겁이 많아 이것저것이 넣다 보면 당일 산행도 50리터가 딱이다. 여기에 1박을 한다면 침낭, 여벌 옷, 타프, 늘어나는 부식, 하여튼 80리터가 꽉 찬다.

내 배낭에 뭘 넣고 뭘 뺄지 안다면, 이미 제대로 된 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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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배낭에 뭐 들었어요?' '배낭 무게가 얼마나 돼요?'

내 대답은 한결같다.

'뽕배낭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필요한 물건이 빠짐없이 들었으니 뽕배낭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게를 대신 져주는 후배들이 많아져서, 그들의 배낭에 비하면 내 배낭은 뽕배낭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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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짐이 많았던 건 아니다. 누구나 초보 시절엔 무게가 싫다. 아니 지금도 무게가 싫다. 하지만 겁이 많아서, 주위에서 아무리 배낭 무게를 줄이라고 잔소리를 해도 별도리가 없다.

산은 참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해도 내 예상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는 일찍 오고 늦게 그친다. 바람은 수시로 불고 기온은 예상보다 더 떨어진다. 같이 간다던 인간은 당일 아침에 산행을 취소하고, 사고는 예고 없이 일어난다.

그럴 때 믿을 거라곤 내 배낭뿐이다.


결국 참고 견뎌온 무게가, 나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