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주말이 다가오면 습관적으로 배낭을 꾸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전만큼 설레지 않는다. 짐을 싸는 일이 출근 준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늘 준비된 필수 장비를 넣고, 날씨에 맞는 옷을 고르고, 산행 일정에 맞춰 간식과 부식을 챙기는 일련의 동작들이 몸에 새겨진 탓에, 머리가 따로 개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처음 산을 오르던 시절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었다. 산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계곡의 끝은 어떨지, 다음 능선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늘 긴장하며 걸었다. 온몸의 근육과 감각은 깨어있었고, 단단한 긴장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세월이 쌓이자 대부분의 길은 수십 번씩 걸었고, 봉우리들은 셀 수도 없이 올랐다. 발이 먼저 알고 무릎이 먼저 기억한다. 어디서 숨을 고르고, 어디서 페이스를 올려야 하는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길들이 있다. 길만 외운 게 아니라 나무와 바위와, 꽃자리도 외웠다. 저 바위 틈새에 귀한 설앵초가 언제 피는지, 이 길이 얼레지 꽃밭이 되면 얼마나 멋진지. 여름의 큰 비가 지나고 오른 산에서, 익숙한 바위가 무너져 내린 것 보면 가슴 한편이 서운하고, 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고사목을 보면 친구의 부음을 받은 것처럼 슬프다. 산의 변화가 사람의 부재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도 달라졌다. 어떤 이는 무릎이 안 좋아졌고, 어떤 이는 바빠졌고, 어떤 이는 다른 취미를 찾아갔다. 어떤 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우고, 그 사람들 마저 떠나면 혼자 걷는다.
이제는 산을 기억으로 오른다. 발걸음 사이사이에 과거가 끼어든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