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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계 Apr 21. 2016

홍콩섬의 거리는 야릇하다

홍콩의 기분_4


란콰이펑이 야릇하다던데.

다행히(?) 도깨비 여행의 핵심은 체력관리라, 삼일 내내 홍콩의 밤을 즐길 새도 없이 숙소로와 잠을 청했다. 다시 말해 동양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란콰이펑의 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젠장!




홍콩섬의 흔한 마천루


대신 낮시간에 '썽완 - 소호 - 란콰이펑'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닐었다. 딱히 분명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영화 <중경삼림>에 나온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야겠다는 목적만 가지고 나섰던 차였다.


홍콩섬의 흔한 아파트


센트럴역에 내려 언덕을 오르고 올라 에스컬레이터 앞에 당도했다. 가는 길에 구비구비 홍콩섬의 골목들을 맛볼 수(?) 있었는데, 그 모양이 꼭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구엘 공원을 찾아 언덕을 오를 때와 비슷해 놀랐다.


4차선 건널목 한 번, 한 블록 올라가 2차선의 좁은 골목 한 번, 다시 한 블록 올라 4차선 건널목 한 번. 양 옆으로 뻗은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상점들까지.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내려가는 길


워낙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라는 수식어가 강렬해서였을까, 내 머릿속 에스컬레이터는 직선으로 쭈욱- 뻗은 모양이었다. 밑에서 보면 하늘까지 닿아있고 위에서 보면 멘틀까지 들어갈 것 만 같은.


그러나 정작 현실의 에스컬레이터는 서울 6호선 삼각지역 에스컬레이터보다 짧은 녀석들이 여러 개 이어진 형태였다.


흠.


예상과 다른 모습에 실망하려던 찰나, 녀석들은 내게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찬찬히 올라가는 레일에 몸을 싣고 있으니 온갖 홍콩들이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내가 진짜 홍콩이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길다


창밖의 홍콩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난 소호를 지나 에스컬레이터 꼭대기에 올라있었다. 사뿐히 레일에서 내려와 올라왔던 길을 내려갔다. 오르며 만난 홍콩들과 내려오며 연이어 하이파이브하는 기분이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밑으로 갈수록 빈곤층이 위로 갈수록 부유층이 산다는 느낌도 받았다. 동네도 그랬고 집도 그랬고, 공기도 그랬다. 난 괜히 아래가 더 잘 맞았다.


편하달까.


그래서인지 올랐던 길을 다시 다 내려와 썽완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점심을 먹었다. 소호에도 맛집이 많았는데!


 


썽완의 노천 맛집


썽완은 전반적인 정취가 예스럽다. 골동품 상점이 많고 옛 홍콩이라 상상되는 건물들도 많다. 썽완 거리 끝자락엔 만모라는 도교사원도 있었다.


만모사원의 붉은 조명


사원 안에 들어서면 향내가 온몸을 휘감는다. 붉은 조명 아래 선 관우의 동상과 그 앞에 숲처럼 꽂혀 있는 향대가 인상적이었다. 나 같은 사이비 신도가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입구에서 우측을 보면 북이 하나 있어 다른 신도가 하는 걸 보고 따라서 세 번 두드렸다.


소원은 가족의 안위와 영원한 사랑(?).




코즈웨이베이 어느 쇼핑센터


센트럴을 기준으로 썽완의 정반대 편엔 코즈웨이베이가 있다. 역에 내려 메인 스트리트를 마주하고 서면 딱 도쿄의 시부야, 서울의 명동이 떠오르는 곳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썽완과 지정학적 위치도 반대였고 정서도 정 반대였다.


도.. 도시닷.


코즈웨이베이에서 어찌어찌 구룡만 쪽 해안으로 나가면 '눈 데이건'을 만날 수 있다. 이름 그대로 눈데이(정오 12시)에 발사되는 건(총)인데, 16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매일 같이 발사되고 있다고 한다.


눈 데이건의 자태


조급한 성격을 남 못 주고 20분 전부터 앞에 도착해 총성을 기다렸다. 12시 정각, 50년은 이 총만 발사하며 살아오셨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제식에 맞춰 등장하시더니 구룡만을 향해 눈 데이건을 발사하셨다.


쾅-!


상상 이상의 소리에 놀랐다. 와... 보길 잘 했어. 발사 순간 지루했던 기다림의 불만이 깡그리 사라졌다. 아니 심지어 홍콩에 오길 잘했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생경한 경험이었달까?




발사식이 끝나고 20여 분간 눈 데이건을 가까이서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호기심이 발동한 난 당장에 달려가 총쏘기 전에 할아버지가 치셨던 종을 만져보았다.


종 몸체 아래로 내려온 줄을 잡고 뎅- 뎅- 거리다 실수로 강하게 종을 쳐버렸는데, 귀 바로 옆에서 울린 종소리 덕에 사실상 고막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그 후 한동안 이명이 들렸다는). 짜릿해..!




붉은 것들이 줄지어 서있다


홍콩섬에서 만난 곳들은 흔히 '홍콩'하면 가진 판타지를 만족시켜주었다.

하늘을 찌를  위태로운 빌딩가, 어지러운 간판이 가득한 뒷골목, 그런 홍콩과 너무나도 다른 유럽풍의 거리, 빠알간 택시의 행렬, 2층버스-보행자-트램이 혼재된 건널목.


야릇하단 말이 딱 어울린다.


홍콩의 카타르시스는 온통 홍콩섬에 있으니 말이다.


end.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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