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웠다 정선아

나를 키운 8할의 고장.

by 주안

그 시작은 이러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마와 싸웠다. 어디로든 좀 떠나고 싶었다. 집에서 가까웠던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서울 터미널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그것이 이별의 냄새인지 만남의 냄새인지, 혹은 사람들의 체취와 버스들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들의 잔재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뭔가 사람의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버스를 타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강원도행 버스표를 파는 창구로 성큼 다가갔다. 내 나이 스물이었다. 창구의 매표원 아가씨는 나를 한번 흘끗 보더니 빨리 목적지를 말하라는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정선이요. 한 장. 정선이 어딘지 전혀 몰랐다. 그냥 이름이 다정해서 말해버렸다. 속초, 강릉, 횡성이라는 이름은 도시적인데 정선은 아니었다. 동네 친구 이름 같았다. 어쩌면 그곳에서 친구 같은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정선과 나는 어쩌다 인연을 맺어 버렸다.


멀미가 날 것을 대비해 귤 한 망태기를 얼른 사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의 여행인지 고행인지 모를 여정은 시작되었다. 정선이 그렇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동네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버스는 끝간데를 모르고 달리고 있었다. 낯선 시골길을 달리는 재미와 목적지를 모르고 가야 하는 두려움이 섞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창밖의 풍경이 바뀔 때마다 귤을 머금은 입에선 연이어 탄성이 나왔다. 깎아지른 듯 한 산세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단짝을 이루어 도시 촌년의 마음을 홀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도시를 조금만 용기 내어 벗어나면 이런 세상이 펼쳐지는구나. 엄마와의 다툼은 잊은 지 오래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무궁무진했다.


그 날 이후로 삽 십 년 가까이 나는 매년 정선을 다녔다.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게 되면서 많게는 1년에 서너 번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녔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의 상황이 바뀌는 길목마다 정선으로 회귀하여 흔적을 남겼다. 어느 때이든 상관없이 정선은 다정하고 푸근하게 나를 반겼다. 아니, 나는 정선에 안겼다. 산과 강에 뿌려지던 자연의 빗소리며 바람들이 골짜기를 누비는 소리, 눈보라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는 풍경을 듣고 보노라면 복잡한 도시에서 멍들었던 상처들은 조용히 아우라지 강줄기를 따라 떠내려 갔다. 참으로 놀랍도록 감사한 시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젠 그만 갈까 보다. 정선이 많이 변해버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니 편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갈 때마다 재정비된다. 낯익고 친근했던 것들과 자꾸만 이별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마음이 먹먹하다. 시골 촌색시처럼 수수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도시처녀처럼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걸치고 화려해진다. 옛길의 정취는 그 냄새를 잃었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정선과의 추억이 그리운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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