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게 설득당하여 용기를 내 보는 때. 나의 원함에 반응하여 가슴이 뛰는 그런 때 말이다.
저녁 식사 후 한통의 전화를 받은 남편은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하더니 생각이 많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세입자가 사정이 생겨 더 이상 가게를 못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한다는 것이다. 계약기간은 남아 있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의도치 않은 상황이야 언제라도 올 수 있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래서 알겠노라고 대답을 드렸다. 허나 뒤숭숭한 사회적 분위기에 다른 세입자를 금방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 다행히 영업 종료를 원하는 날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우리 부부는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에 들어갔다.
가게 위치가 도시의 중심가이거나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였다면 좀 수월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전 서울을 떠나 귀촌하면서 동네 어귀에마련한 작은 공간이었다. 몇 군데 부동산에 알아봤는데 돌아온 대답은 밝지 않았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 난감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뾰족한 방법 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고민을 하며 창밖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나의 아련한 꿈이 툭 하고 고개를 내민 것이다.
' 아, 내가 하면 어떨까. 책방 '
나의 책방지기 꿈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타지에서 일을 하셨던 부모님의 부재로 나에게 집은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늦게 끝나니 괜찮았지만 주말은 사정이 달랐다. 토요일 점심때 하교 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앞다투어 집에 가기 바빴다. 하지만 나는 혼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내에 있는 책방이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보다 훨씬 좋았다. 돈이 없어 매번 책을 살 수는 없었지만고맙게도 주인아저씨는 어린 단골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덕분에 책방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책 냄새를 맡으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 시절 책방에서 만난 다양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감동과 눈물, 놀라운 상상과 날카로운 지성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가 있어서 참 좋았다. 비록 만날 수는 없었지만 수많은 작가들은 나의 특별한 친구이고 고마운 멘토가 되어 이따금씩 욱신거리던 내 성장통을 선한 영향력으로 치유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갉아먹으며 결핍과 불안에서 오는 정서적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그럴 때면 언젠가는 나도 책방을 열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그런 꿈을 꾸면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책방 문을 나섰었다. 그러면 혹시나 오늘은 부모님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헛된 희망도 더해져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 지곤 했다.
책방을 열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심하게 반대를 한건 언니들이었다. 요즘 누가 책을 사냐며 한걱정을 한다. 산다고 해도 대형 서점도 있고 온라인으로 사면 할인도 받는데, 게다가 시 외곽까지 누가 오겠냐며 안된다는 것이다. 나이나 젊니 지금 실패하면 손해가 얼마냐고 다 같이입을 모은다. 내가 조용히 듣고만 있자 셋째 언니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 그럼, 다이소 해. 주택들이 많으니까 생활용품 전문점이 딱 좋다. "
그 말에 모두들 맞장구를 치며 내 눈치를 살핀다. 나도 알고 있다. 언니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요즘 도서시장이 계속 하락세이며 경제적인 문제들로 많은 책방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그나마영업 중인 책방들도 나름의 콘텐츠를 개발하여 살길을 모색하느라 동분서주한다는 것도 들었다. 합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져본다면 누가 봐도 나의 시작은 어리석은 것이다.
현실은 늘 이렇게 소망보다 힘이 세다. 나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의 실패와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도전보다 안정을 택하며 살아온 날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볼 참이다. 책방 운영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지만 모든 일에 처음은 있지 않은가. 하나하나 서툰 발품을 팔아가며 알아가는 중이다. 고백하자면,멋지고 근사하게 책방을꾸미고 톡톡 튀는 마케팅으로 승부하겠다는 자신감이나 포부 같은 건 내게 없다. 그저 유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에게는 위로를 , 누군가에게는해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다는 소망한 줄이 무모한이 도전의 소박한 출사표다.어쩌면 겨우 그 거였냐고 꿈같은 소리 한다고 타박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 찾아온 '그런 때' 를 붙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