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일찍 책방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활짝 열려진 문으로 웬 중년 신사분이 들어왔다.
가슴에는 하얀 봉지가 안겨져 있었다.
그는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테이블 위에 조용히 놓은 정체모를 봉지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나도 얼떨결에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그였다.
- 혹시 이런 것이 필요하거나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지만,
이 책방에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
그러더니 매듭을 풀고는 그 속에서 두꺼운 국어사전과 영한사전,
색이 약간 바랜 몇 권의 책을 꺼내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나에게 그가 해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 겸 휴식 겸 들어왔는데
이제 다시 나갈 생각이 없어졌다고 한다.
가져온 사전은 그가 뉴질랜드에서 애지중지 사용하던 것이다.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뒤적여가며 우리의 국어를 살펴보고 낱말을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외국인 친구들에게도 사전에 담긴 수많은 한글을 보여주는 뿌듯함도 컸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필요하지 않다.
향수병에 걸릴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 누군가 필요한 분에게 국어사전을 선물하고 싶었다.
어느 날 볼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다가 우리 책방을 보게 되었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국어사전이 이곳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 책방에서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국어사전이랑 제가 아끼던 책 몇 권을 더 챙겨 왔습니다.
싫지 않으시면 받아 주세요 -
나는 오히려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을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건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침부터 찾아와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그의 선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책방에 놓아두고 혹시나 필요한 분이 있다면 드리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것도 아주 좋다고 했다.
기쁜 얼굴로 문을 나서는 그를 보며 애국자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구나 싶었다.
자신의 언어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거창하지 않은,
사소한 듯 하나 소중한 애국이 아닌가 싶다.
국어사전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진 의미 있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