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분이 책방으로 들어왔다.
노란색에 흰 줄무늬 점퍼가 상큼했다.
길게 내려뜨린 머리카락이
잘 어울린다고 보자마자 생각했다.
그녀는 나와 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싶었다.
책방을 둘러보던 그녀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기에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책마다 써 놓은 나의 긴 리뷰들을 읽더니
까르르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진짜 이런 책방이 있었네요.
제가 늘 원하던 모습이에요.
사실은 아는 언니한테 너무 우울하다고
하소연했는데 이곳을 소개하면서
한번 가보라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아주 행복해졌어요"
책방에 들어서서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말이 그녀를 닮아 예쁘게 느껴졌다.
#2
문이 열리며 동네 꼬마가 들어왔다.
늘 엄마와 오던 단골손님이었다.
엄마는 안 오셨냐고 물으니
오늘은 혼자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아이는 책방 소파에 가방을
척척 내려놓더니
나에게 다가와서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인데요.
갑자기 책방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왔어요. 헤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서
책방이 보고 싶어
들렀다는 말을 듣다니
아이도 그 말도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오붓하게 앉아
군고구마와 사탕을 나눠 먹으며
코로나 시대의 여행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엄마에게는 전화를 먼저 드렸다)
#3
이웃 사시는 아주머니가
멋지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과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나와 간단히 눈인사를 나누더니
그 여성분에게 이것 봐라 맞지?
동네 책방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성은 그러네 책방이 있네 했다.
"내 친군데 서울서 놀러 왔거든, 이렇게
심심한 동네서 사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동네는 낭만적인 책방이 있다고 하니까 보고 싶다잖아.
자랑하려고 델구왔지.
여기서 책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원하는 거 말하면
틀어주고 얼마나 좋은데.
최고지"
아주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친구분과 나는 그걸 보고 함께 웃었다.
아주머니의 말에서 진심 어린 응원과 격려가 느껴졌다
참 감사했다.
#4
청년이 들어왔다.
아니, 들어오기 전에
그는 문을 반쯤 열고
안과 밖을 몇 번 두리번거렸다.
내가 얼른 나가서 인사를 했더니
그제야 문을 활짝 열었다.
청년의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책방을 맞닥뜨린 분들에게서
익히 보아오던 것이기에.
청년은 두 권의 책을 들고 내게로 왔다.
계산을 하는 나를 향해서
며칠 전 이곳으로 이사 왔다고 말했다.
"오늘 쉬는 날이어서 동네 구경이나
할까 하고 나왔어요.
생각 없이 걷는데 책이라는
푯말이 보여서 이상하더라고요.
처음엔 잘 못 본 줄 알았어요.
이런 곳에 서점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문도 보라색이고, 동화 속 같아요.
책방 있는 동네에 살게 되다니.
저는 행운아네요"
청년의 센스가 느껴지는 말이
듣기 좋았다.
책 좋아하는 이웃이 생겨
제가 더 행운입니다 라고 말하니
청년이 활짝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많은 말을 듣고
많은 말을 하며 산다.
말에는 상대의 감정이 녹아들어
나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좋은 말을 들으면 단순히
기분만이 아니라
때론 영혼도 일으켜 세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꽃길 같은 말잔치의 향연이 아니다.
때론 흙길, 똥길 같은 지독한 소리로
가슴을 헤집혀야 한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그럴 때,
예쁘고
사랑스럽고
격려되었고,
센스 있었던 말들을
치료제로 꺼내먹으며
회복하고 싶다.
나도 그런 말로 누군가의 치료제가
되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더 절실히
말에 대해 살피고
조심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