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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안 Dec 09. 2020

생(生)을 위한 공간

깃들이면서.

깃들이다:

사람이나 건물 따위가 어디에 살거나 그곳에 자리 잡다.




"베란다를 싹 치우고  제가 좋아하는  흰색 레이스 커튼을 달고  편안한 의자도 놓았어요.

 스탠드도  한편에  세워두고.   아,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했어요. 여기는 엄마의 공간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하지 말아 달라고요. 저 잘했죠? "


"네, 아주 잘하셨어요.  무엇보다  자신부터 그 공간을 허투루 대하지 말고  자주 깃들면서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이른 아침, 책방 청소가 마무리되고 있을 즈음,  테이블을 닦고 있는데  문 앞에  자전거가 섰다.  10시가  오픈이지만  나는 8시 30분이면  출근하여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한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그 시간에도 손님들이  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첫 손님은  엄마와 세 살배기 꼬맹이였다. 그녀는 열린 문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디밀더니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9시 10분이었다.

왜 이 시간에 이렇게 책방으로 달려와야 했을까. 나는 청소도구를 정리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차 한잔을  부탁하고 안쪽  소파에  아이와 앉았다. 책방에는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

모녀가 추울까 싶어 얼른 문을 닫아주었다. 창 밖에선 가을이 무르익어 금방이라도 모든 묻어 둔 마음들을 헤집어 놓을 듯했다. 아마도 이미 그녀 마음은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를 준비해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엄마의 여유를 지켜주고 싶어 나는 아이에게 책방 구경을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빛이 내심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는  얌전하고 순했다. 낯선 나와도  눈을 맞추며  잘 놀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사이를 거닐며  책들을  살펴보았다. 이따금 미소를 짓기도 하고 멍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나의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경력이 단절된 육아맘이겠구나 싶었다. 나도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기에 더 맘이 쓰였는지 모른다.


침묵을 깬 건 그녀였다.

-책을 좀 추천해 주세요. 읽을 시간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고 싶네요.-

나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책은 시간이 나서 읽는 게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읽는 거랍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시울이 빨갰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를 듯했다.

-엄마가 된다는 게, 엄마의 자리라는 게 , 감사한 건데.  때론 참 어렵고 고되요. -

나의 말에 결국 그녀는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요 육아를 버거워하는 것이 나쁜 엄마인 건 아니에요. 

다만 애를 키우는 것에 너무 비장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아이도 중요하지만 자신에게 먼저 쉼을 주시면 어떨까요?-


그녀에겐 세 살배기 위로  터울이 지는 큰 아이가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큰 아이와

늦게 낳은 둘째, 그리고 바쁜 남편과 일을 그만둔 자기 자신.

마음과 다르게 짜증이 늘고 답답하다고 했다. 좋은 엄마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갑자기 너무 막막하고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에게  지금 당장 뭘 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본인이지요.

 집에 가셔서 자신만의 작은 공간 하나 만드세요. 어디든 괜찮아요. 그렇게 해보세요. 꼭-


나는 그녀에게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걸 권유했다.  

그 말에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그녀는 그렇게 하겠노라며 올 때와는 다른 씩씩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가을바람을 날개 삼아 그녀는 힘껏 페달을 밟으며 쌩하고 달려 나갔다. 

다음에 그녀를 만난다면 오늘보다는 좀 더 행복한 모습이길 바라면서  사라지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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