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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안 Dec 11. 2020

늙은 사랑은 없다

박 여사님이  책방 앞을  급히 지나시기에  얼른 쫒아 가 어깨를 붙들었다.

"어딜 가셔요?  잠깐 와보셔요." 

하며 책방으로  모셔왔다.



전날 오후에  책을 정리하고 있을 때 , 슬며시 문을 여시 더니

" 야야  이거 먹어라. 맛은 읍써 " 

하시며 의자에 검은 봉다리를 얼른 놓고 가셨다. 어찌나 재빠르신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봉다리를 열어보니  아직  뜨끈한 고구마튀김이었다. 두툼하고 큼직한 게  역시  정 많은 박 여사님 다웠다.

밭에서 키우신  고구마를 요리해 드시다가 혼자 있는 내가 생각나서 가져오신 게 분명했다.

말씀은 늘 툭툭 뱉으시지만 속 정이 깊은 분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박 여사님은 사교춤의 달인이었다. 홀로 아들들을 키우며 온갖 억센 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그때마다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푸는 방법은 춤이 최고라고 말했었다.  

딱 세 번 스테이지를  미친 듯이 돌고 나면  기분이 화끈한 것이 마음까지  말랑해진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그뿐인가.  화려한  액세서리는 여사님의 무기와도 같았다.  과부인 것도 서러운데 초라하면 안 된다면서.

무엇보다  남성들에게 춤 추자는 프러포즈를 받으려면 이 정도는 걸어줘야 한다며  금 빛깔의 샛노란 귀걸이와  체인으로 된 목걸이도 두 개씩 겹쳐서 하셨다. 그거 다  진짜 금이냐고 여쭈면 암만 금이지. 도금도 금이지. 하시며 당당한 분이었다.  그런 박 여사님이 나는 좋았다. 


얼마 전 동네 다른 할머니가 책방 구경을 오셨다가 나에게 슬쩍 한마디 하신다.

박 여사 연애하는 거 아는가? 모르는 척 해.

나는 옳다구나 싶었다. 언젠가부터 가끔 책방 앞을 지나실 때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항상 1미터 정도를 간격으로 웬 할아버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시며  같이 걸었다. 

처음엔 우연인가 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어째 분위기가 몽글몽글 하다 싶더니 역시나 였다.

그 할아버지의  얼굴은  오가며  뵈어서 알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과묵하고 조용하신 분이었다. 두 분이 연인이라는 게 선뜻 그림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박 여사님의 선택이라면 나는 무조건 응원할 생각이었다.




책방으로  끌려오다시피 하신 여사님이 나를 보시며  빨리  밭에 가야 하는데 어째 그러냐.  하신다.

나는 고구마튀김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따끈한 대추차를 일단 건넸다.

" 밭에 나가서  일을 하셔도 왜 이리 예쁘셔요. 연애하는 사람같이.."  했다.

그 말에  힐끔  나를 보시더니 피식 웃으시며

"어디서 들었냐. 나 연애하는 거. 근데 지금 싸워서 말 안 한다. 밴댕이여" 

라며 인상을 지푸리셨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뻤다. 마치 내가 연애를 하는 것처럼 좋았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붉다. 홍조 빛이 난다.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린 모두 각기 다른 얼굴이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만은 같은 얼굴이다”

얼굴만이 아니라 나이도 같은 형태를 띠는 건 아닐까

물리적 나이가 있을 뿐,  결코 늙은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두 사람의 감정 안에서 파릇하고 젊다.


차 대접을 할 테니 두 분이 꼭 같이 오시라고 했다.

책방 핑계로 화해도 하시라고 했다. 여사님은 얼굴을 한번 쓱 문지르시더니 

" 어쩐가 몰라.  데이트도 요것이다 할만하게 못했어. 그냥 시장 가고 밭에서 일하고 그게 다인 거지.

  책방에서 오란다고  얘기는 한번 해 보까. "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오시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받고 여사님을 보내드렸다. 

사람의 감정은 늙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 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랑도  분명 그럴 것이다.

부디 두 분이 화해하시고  책방에 오시기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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