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늘 May 20. 2020

상모 돌리기 아가씨

마늘 단편 - 걸어야 보이는 더 많은 것들



오늘은 웬일로 가지런한 치아에 잘 다려 입은 티셔츠와 진을 입은, 누가 봐도 공부를 참 잘하겠거니 생각이 들만한 여자 학생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보통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때는 술냄새 고약하게 나는 빨간 코 아저씨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역시 그렇게 보겠지만) , 혹은 이동하는 내내 시끄럽게 전화통화를 하는 아주머니가 내 옆자리의 주 고객들이기 때문에 오늘은 뭔가 기분이 묘했다. 버스가 출발했고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글 정리할 것도 많고 보정할 사진도 많았던 나는 의자에 준비되어있는 작은 간이 테이블을 펴고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자리의 아가씨가 상모 돌리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상모 돌리기란 농악에서 긴 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고개를 아주 힘차게 돌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상모 돌리기를 하는 사람을 쇠꾼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본인의 자리에서만 작은 파동으로 하던 상모 돌리기가 점점 반경이 넓어져 내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극히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내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아가씨, 아무리 흥이 나도 그렇지, 이렇게 버스 안 좁은 자리에서 상모 돌리기를 하면 안돼요.'


 라고 정중히 말하려 얼굴을 돌렸는데 옆자리 아가씨가 눈을 감고 상모를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코에서 소리도 났다. 그녀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노트북을 접고 아가씨가 상모를 돌리다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의자에 있는 간이 테이블도 서둘러 접었다. 아가씨는 귀신 들린 것처럼 상모를 돌려댔고 나는 최대한 그 반경에서 벗어나려 좁은 버스 안 자리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는데, 삼십 분 정도 씨름하다가 지친 나는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누군가 툭툭 어깨를 건드려서 잠에서 깨어났는데, 범인은 뒤쪽 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였다. 옆자리를 보니 아가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 있었다. 뒷자리의 아저씨는 목을 잠근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네들, 상모 돌리기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좁은 버스 안에서 둘이 붙어 앉아 눈을 감은채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모 돌리기를 하는 것이 보통 내공이 아닌 것처럼 보이네만. 우리 진주 농악단에 들어오지 않을 텐가? 자네들 정도 스킬의 상모 돌리기 면 프라하 성에 있는 목이 360도 돌아가는 부엉이 보다 더 인기가 좋을 것 같네만." 


나는 아저씨의 대답을 미루고 창 밖을 바라본다. 창밖으로는 별똥별들이 비 오듯 쏟아진다. 어느새 밤이 되었지만 태양은 여전히 떠있다. 문득 두려움에 빠진다. 


'내가 잠을 자면서도 이토록 멋지게 상모 돌리기를 한건 것이 들통나면 어쩌지?' 

'만약 이 일로 인해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번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지?'

 '평생 상모 돌리기만 하며 돈을 벌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떨어지는 별똥별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그 별똥별들은 하나하나가 찬란하고, 밝고, 아름다웠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작가의 이전글 장난전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