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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D Mar 24. 2021

04. 후배가 청첩장을 주러 왔다.

당돌했던 그 아이

선배, 일요일에 별 일 없으시죠?


대학시절 후배 송이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일 있어서 서울 오는 김에 청첩장을 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시국과 재택근무 탓에 통 외출할 일이 없던 터라 냉큼 약속을 잡았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통 못 봤으니 아마도 5~6년 만에 만나는 것 같다. 왠지 어색할 것 같았...기는 무슨, 녀석은 날 보자마자 코트가 무슨 조선시대 내시 관복 같다고 빵 터졌고 나는 뉘예뉘예 장단 맞추며 서촌 대로변에서 한참을 웃었다.




송이는 내가 갓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당시 나는 K고등학교 동문회 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었다. 우리 과에 들어온 K 출신들이 만든 동문회인데 사실 그리 달갑지는 않은 자리였다.


살면서 무슨 대표니, 장이니 그런 것들을 해본 경험도 없었고, 무슨 가족오락관 폭탄 돌리기처럼 다들 귀찮아서 미루던 차에 마침 전역하던 내가  걸려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학생의 최우선 과제는 학교 적응과 연애가 아니던가. 동문회니 후배니 신경  겨를도 없었고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매년 적어도 서너 명씩은 동문회에 들어오던 신입생이 하필 내 대에서 송이 하나밖에 안 들어왔고 그게 내 탓은 아닐진대 눈총을 좀 받던 상황이었다. (지금도 왜 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과인이 부덕하여..뭐 그런 걸까.) 이런 맥락에서 송이는 사이비 회장에게는 놓쳐서는 안 될 VIP였다.


후배의 마음은 지갑으로 얻는다고 했던가. 일단 밥부터 사주자는 생각에 3월의 어느 날, 송이와 과 건물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생각보다 작고 순둥해보이는 VIP 곁에는 예상치 못한 제3의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초면인 VIP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얘는 제 친구인데 밥 같이 사주시면 안 될까요? 저 없으면 점심 혼자 먹어야 되거든요.”


송이는 그런 캐릭터였다.


마냥 순둥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말은 반드시 하는 아이였고, 그건 주로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불합리한 일에 이의를 제기할 때였다.


게다가 녀석은 자기 앞가림도 못지않게 잘했다. 조용조용 학교만 다니는  알았더니 아무나  붙는 시험을 일찍부터 알음알음 준비해서는 남들보다   먼저 꿈을 이뤘다. (그게 벌써 5 전이란다. 아이고 세월아.)


올곧고 정이 많은 송이, 야무진 송이는 가정을 이뤄서도 변함없을 것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지금처럼 잘 헤쳐나가겠지. 혼자서도 잘 해왔는데 앞으로는 든든한 팀 메이트도 생길 테니 분명 더 잘 살 것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청첩장 봉투 겉에 윤동주 님의 ‘서시’ 이야기가 있어 물어봤더니, 남한테 부끄러울 짓 한 점 하지 않고 사는 모습이 선배의 장점인 것 같아서 썼다고 배시시 웃는다.


실제 내 모습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런 삶을 살고 싶었고, 몇 년 전부터는 구체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었기에 후배가 정성 들여 써준 인사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다. 결혼 축하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게. 식장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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