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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Mar 07. 2022

제주 쉼 게스트하우스에서 쉼

숙소이자 카페이자 영화관, 이곳은 작은 낙원이다.

2009년, 42일간의 유럽여행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게스트하우스를 참 많이도 다녔다. 당시에는 5천 원짜리 밥도 사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대학생 시절이라(아니 쌈짓돈을 모아서 유럽으로 떠난 것만 하더라도 대단하다) 어쩔 수 없는 숙소 선택이었지만 이 경험 덕분에 진정 여행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여행이라는 것의 가장 큰 의미는 낯선 경험이기 때문이다.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면 반드시 낯선 일을 마주할 수 있다. 아… 갑자기 쿠알라룸프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이집션 친구들이 생각나는데 지금은 제주 여행기를 쓰고 있기에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뤄두겠다.


쉼 게스트하우스는 사장님이 직접 지으신 2층 건물로 협재 바다 근처에 위치해있다. 숙소 설명을 보면 느낌이 오겠지만 사장님께서 사근한 스타일은 아니시다(술 드시고 밤늦게 올 손님은 예약을 안 하는 게 좋다고 쓰여있음ㅋㅋ). 게하 마니아로서 이런 설명을 보면 고수의 숙소구나 하는 감이 온다. 게하(및 유스호스텔)는 정말 숙소에 따라 상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2-30곳쯤 경험해본 것이 아니라면 몇 개만 가보고 게하는 깨끗하니까 좋은 곳이구나, 혹은 저렴하니까 지저분한 곳이구나라고 속단하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하기 전까지 두근두근한 재미도 있다. 여하튼 나는 한라산 등반을 끝내고 무겁고 지저분해진 몸을 이끌고 쉼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독실/2인실만 운영 중이었고, 나는 2인실로 예약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내부에 마련된 깨끗한 화장실, 가지런한 침구류와 개별 암막커튼, 그리고 개인 전구색 조명과 독서용 스탠드까지… 이곳은 완전 내 스타일이었고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 룸메에게 인사를 하고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등산 후 따뜻한 물 샤워는 정말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 오는 길에 식사는 해결했기에 가볍게 낮잠을 잔 후 챙겨 온 책과 아이패드를 챙겨서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은 전체적으로 우드 인테리어가 되어있어 따뜻한 느낌을 주었고, 높은 층고와 창 밖으로 슬쩍 보이는 협재 바다 뷰를 통해 내가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게하의 아름다운 휴게실(리빙룸?)에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는 여행지의 예쁜 카페에 가는 것과는 결이 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한옥 독채 펜션의 마루에서 파자마를 입고 쉬는듯한, 낯설지만 편안한 공간에서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커다란 8인용 원목 식탁에 혼자 앉아 아이패드를 켜서 글을 썼다. 이 집 커피가 정말 맛있다는 블로그 후기를 봤기에,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시크하게 머신이 있으니 알아서 먹으면 되지라고 하셨지만, 제가 처음 와봐서 좀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며 커피를 내려주셨다. 커피의 맛은 끝내줬다. 나는 커피의 산미와 깊은 풍미를 좋아하는데 강릉 테라로사 본점의 커피 이상으로 맛있었다.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시간은 풍요로웠고 빈틈이 없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서 영화 상영시간인 20시가 되었고, 오늘의 영화는 스타이즈본 이었다. 휴게실 입구에 CGV 쉼 게하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스피커와 프로젝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장님의 고급 취향 덕분에 편안한 소파에서 짱짱한 음향과 선명한 영상으로 영화에 푹 빠질 수 있었다. 평소에 보는 영화가 2차원의 경험이라면 제주 게하에서의 영화 감상은 3차원의 경험이었다. 쉼 게스트하우스! 다음에는 아내와 함께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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