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은 나에게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던 불안함과 걱정.
그래도 6년을 쉼 없이 일했으니 한 달 정도 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퇴사하고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려니 바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참아볼걸 너무 섣부르게 퇴사를 결정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직할 곳은 마련해 뒀어야 했나, 이만큼 괜찮은 회사를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사람에게 근심, 걱정과 같은 어두운 생각은 좋은 생각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이렇듯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혼자만의 여행
나는 조금 우유부단한 성격이다. 그리고 약간의 선택 장애도 있다. 흔히 얘기하는 팔랑귀는 아닌 듯하면서도 은근히 갈팡질팡 하는 경우가 많고 무언갈 선택할 때도 그냥 누가 딱 골라줬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대책 없이 퇴사를 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내 결정은 참 무모했다. 지금 같으면 어떻게든 이직할 곳을 구해놓고 나왔을 텐데 그땐 퇴사도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랐다.
시원하게 퇴사를 질러놓고 바로 기약 없는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해하던 난 이대론 정말 안되겠다 싶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을 생각해 봤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 건 휴식이었고 휴식하면 역시나 여행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여행을 떠나기로. 그리고 이번엔 특별히 혼자서 떠나보기로.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혼자서 여행을 떠나본 적은 없는데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내에게 얘길 했더니 무슨 소리냐며, 갈 거면 같이 가자 펄쩍 뛰었었는데 이번 한 번만 혼자 가보고 싶다는 내 부탁에 결국은 동의를 해줬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해외까지는 혼자 가는 게 부담스러워 국내로 눈을 돌렸고 결국 바다와 산을 모두 볼 수 있는 강원도로 목적지를 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8월의 어느 날, 내 인생 최초의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처음이었기에 혼자서 괜찮을까 하는 걱정과 어떤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왠지 모를 기대감을 안고 강원도 동해시로 떠났다. 2박 3일의 일정이었는데 내 걱정과는 달리 이 혼자만의 여행은 내게 너무도 좋은 시간들이었다. 혼자이기에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좋은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아 급할 게 없었으며 혼자여도 딱히 심심하지 않았던 여행. 덕분에 그간 마주하기 싫어 머리와 마음속에 꾸역꾸역 밀어넣어 두었던 많은 생각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지난 시간에 대하여
내가 6년을 다닌 이 회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사회인이 되고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다행히도 좋은 회사에 들어와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첫 월급으로 가족 모두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고 사람좋고 능력 있는 사수를 만나 업무스킬도 많이 키울 수 있었다.(덕분에 회사에서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회식, 워크숍, 사내 동호회 등 직장인으로 처음 접해보는 것들도 많았고 이름만 들어도 아는, 나름 규모가 있는 회사여서 이직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을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사람들 중에는 처음 봄에도 이유 없이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회사에서 만난 1년 선배가 그랬는데 이 선배와 정확히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부터 회사생활을 하는데 참 많은 의지가 됐었다. 평탄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종종 힘들고 짜증 나는 회사생활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선배. 아마 선배가 나보다 먼저 퇴사하지 않았다면 그 힘든 시간도 선배에게 의지하며 더 버텨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 전까지도 종종 만나서 술 한잔하며 많은 얘길 나누곤 했던 선배. 이 선배를 알게 된 건 큰 행운이다.
내가 입사하고 1년 후에 경력직으로 들어온 동료가 있었다. 처음엔 리액션이 좋아 놀리는 맛에 얘길 많이 하다가 어느새 친해져 버린 이 동료. 이 친구는 나보다 훨씬 먼저 퇴사를 했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연을 이어오고 있다. 나와 결이 비슷해 마음이 잘 맞았던 이 친구는 현재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아전쟁 중이다.
회사와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곳에서 알게 된 이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일을 그려보다
그리고 앞으로에 대해 생각을 해 봤다.
조급함은 언제나 선택지의 폭을 좁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어렵겠지만 천천히 이직할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긴, 첫 입사까지 얼마나 많은 비보를 들어야 했었나. 졸업은 다가오고 줄줄이 들려오는 불합격 소식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는데 그래도 잘 이겨내지 않았던가. 이번엔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아니 그렇게 될 거라 믿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본 동해안의 일출그렇게 2박 3일간의 여행이 끝났다. 아내와의 여행은 항상 어딜 갈지, 무엇을 먹을지 하나하나 정하고 갔었는데 이번 여행은 아무 계획 없이 떠나왔음에도 너무나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동해시로 들어올 때 들렀던 전망 좋은 동해휴게소, 추암해변과 촛대바위, 묵호항 등 그냥 무작정 찾아가 본 곳들 모두가 너무 예쁘고 좋았다. 한 여름 휴가철도 지나 조금은 한적한 분위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추암해변 촛대바위집으로 돌아와 2주 정도 쉬면서 그간 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며 퇴사의 여유를 만끽했다. 물론 가끔씩 스멀스멀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애써 잘될 거라 위안을 삼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 그렇게 내가 정한 2주의 휴식기가 끝나자마자 공부하는 학생처럼 아침부터 노트북을 가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곤 잠도 깰 겸 한 시간 정도 신문을 보고 들어와 취업포털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입사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예전 대학교 졸업반 때가 생각났다. 미친 듯이 회사들 채용공고를 뒤져가며 열심히 입사지원서를 쓰던 그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행히 내겐 6년이라는 제법 그럴싸한 경력이 생겼고 그로 인해 퇴사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출근을 하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퇴사 후 재입사를 하기까지 여러 군데의 면접을 보게 됐고 운이 좋았는지 면접을 본 회사 대부분에서 합격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퇴사와 이직이라는 것도 처음이 힘들지 해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끝나지 않는 고민
물론 직장인의 퇴사와 이직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첫 회사를 나와 이직을 몇 번 해본 나로서는 충분히 도전해 볼만 하다 느껴졌다. 첫 회사의 1년 후배는 아직도 변함없이 그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데 그 친구가 종종 이렇게 얘기한다. 이만한 회사도 없고 이제 나이도 좀 걸려서 그냥 여기 있으려 한다고.
이 후배처럼 이직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고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면 모를까 혹시라도 퇴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 이 얘기를 해주고 싶다.
회사에서 심적으로 너무 힘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앞뒤 재지 말고 그냥 퇴사하라고.
이직할 곳을 마련해놓고 퇴사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럴 여건이 안되고 당장이 너무 힘들다면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물론 달콤한 휴식 뒤에 찾아올 불확실한 내일이 걱정되긴 하겠지만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곳 어딘가에도 분명 길이 있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
오늘도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은 체 월급날만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 직장인들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스트레스 없는 평온한 하루가 되기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해시 수산물 시장에서 쥐포와 마른오징어를 사 왔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당연히 산지(동해시) 제품이겠거니 하고 사온 쥐포가 집에 와서 보니 베트남산이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이 여행에서 유일한 옥의 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