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형의 꿈
편의점 앞에 종우를 두고 식당으로 돌아오며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어차피 종우 취했으니까 대충 시늉만 하고 돌아가서 못 데려와 미안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아냐, 저렇게까지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그냥 가. 지수 씨에게 일단 말이라도 해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은 그동안 지수와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무실에서 마주칠 때 대충 목례만 하는 사이인데 뜬금없이 종우 얘길 하면서 잠깐 같이 가 줄 수 없겠냐고 한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식당에 도착해 지수를 찾았다. 저기 사무실 여직원들과 앉아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웃는 모습이 저렇구나.'
그동안 내가 본 지수의 모습은 대부분 무표정이었다. 하긴, 우리 둘 사이에 뭐가 있다고 웃는 얼굴로 서로를 대할 일이 있었을까. 식당을 가득 채운 연기 사이로 선명히 보이는 지수의 미소가 유난히 밝게 빛났다.
너의 옆 자리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석구형이 물었다.
"야, 종우 어디 갔냐? 얘 아까 보니까 술 많이 마시던데. 화장실에도 없어. 꽐라 돼서 어디 자빠져있는 거 아냐?"
"종우 잠깐 편의점 갔어요. 머리 좀 식히고 들어온대요."
급하게 둘러댄 후 마음을 다 잡고 지수에게로 향했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며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그 애의 모습이 어느새 눈앞에까지 가까워졌다.
다행히 처음과 달리 사람들이 여기저기 섞여있어 지수 옆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눈치를 보다 어느 순간 지수 테이블로 자릴 옮겼다.
"안녕하세요. 물류팀 김민준입니다. 사무실 오가면서 종종 뵀었는데 아실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술기운을 빌려 지수 테이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반가워요. 전 총무팀 이지수라고 해요. 저도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서.. 날이 더워져서 힘드시겠어요.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할까요?"
원래 이렇게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는지 술이 들어가서 인지 생각보다 지수는 나를 대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반가워요, 전 인사팀 최은영 대리입니다."
"전 지수하고 같은 총무팀 윤미정이에요."
덕분에 함께 앉아있던 다른 여직원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근데 민준 씨 키가 몇이에요? 물류팀 중에서 제일 커 보이던데."
최은영 대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가 185였어요. 군대 가서 더 컸으려나? 하하. 다들 술 많이 드셨어요? 진작 이런 회식자리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얼핏 나이도 비슷하다고 들었거든요."
내 얘기에 지수가 묻는다.
"민준 씨 몇 살인데요?"
"저 스물셋이요. 지수 씨는요?"
"어머, 우리 동갑이에요. 웬일이야. 여기 미정이도 동갑이에요. 하하하. 친구였네. 은영 대리님은 우리보다 위구요."
"와, 그래요? 동갑이었구나. 친하게 지내요 우리. 미정 씨도요. 사석이니까 누나라고 해도 되죠 은영 대리님?"
"어머, 초면에? 뭐 그래도 내가 누나긴 하니까 그래요 그럼. 근데 회사에선 안 돼요."
"네 알았어요 누나."
"이쯤에서 우리 짠 한 번 할까요?"
미정의 건배 제의에 우리 네 사람은 함께 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제 본론을 꺼내야 할 차례가 됐다.
"지수 씨,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
"부탁이요?"
"어, 혹시 지수한테 번호 따거나 그러면 안 돼요. 얘 남자친구 있어요."
미정이 끼어들었다.
"아.. 남자친구 있어요?"
그랬구나. 하긴, 지수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게 이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연인이 없을 리가.
순간 내 얼굴 표정을 읽은 최은영 대리가 말했다.
"어머, 얘 서운해하는 거 봐. 진짜 번호 딸라고 했던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분명 내게도 무척 실망스러운 소식이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사실 같이 일하는 친구 중에 지수 씨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가 오늘 지수 씨한테 고백하고 싶다고, 저한테 잠깐 지수 씨 좀 데려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근데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제가 가서 그 친구한테 잘 설명할게요. 어휴, 큰일 날 뻔했네."
내 얘길 듣고 있는 지수의 표정이 살짝 불편해졌다.
"아고, 누군진 모르지만 안타깝게 됐네요. 그래도 맘 잘 접을 수 있게 민준 씨가 말 잘해줘요. 한 회사 다니면서 서로 불편해지진 말아야죠."
미정이 지수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 친구도 이런 상황이면 알아서 맘 잘 접을 거예요. 전 그 친구한테 좀 가 볼게요."
이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종우를 향해 걷는 내내 머리가 멍했다.
남자친구가 있을 거라 생각을 안 해 본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직접 보지 못했고 들은 얘기도 없었기에 혹시나 싶은 가능성으로만 남겨두고 있었을 뿐.
그래, 저렇게 예쁜데 남자친구가 없을 리가.
'종우 아니었음 나도 혼자 헛물켜고 있었겠네'
감정이란 게 그렇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전부이지만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자꾸만 그 사람에게로 시선이 쏠리는 것. 이건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종우는 편의점 테이블에 얼굴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종우야, 미안하다. 내가 지수 씨 데려오려 했는데 못했어. 근데 너 맘 접어야겠다. 지수 씨 남자친구 있대. 그러니까 맘 접는 거다? 알았지?"
술에 취해 잠든 종우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