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산책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물론 내 마음은 우정이라는 그 얄궂은 선을 멋대로 넘어선 지 오래지만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이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얘기하고 나니까 좀 후련하지?"
내 말에 지수가 또 웃는다.
"그러게, 진작 너한테라도 좀 풀어놓을걸 그랬어. 너무 꾹꾹 쌓아두고 있었나 봐."
"그러다 화병 나는 거야. 나 시간 많잖아. 스트레스 만땅으로 차면 나 불러. 술도 한 잔 하고 우리 노래방 좋아하잖아. 가서 시원하게 소리 지르면서 다 날려버리자. 그러고 보니 같이 노래방 가본지도 꽤 됐네."
지수와 난 둘 다 노래 부르는 걸 꽤나 좋아한다. 함께 노래방에 가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심취하곤 한다. 노래 외에도 공통점이 많다. 여름보단 겨울을 좋아하고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등산을 좋아해서 종종 함께 산에 가기도 하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해서 봄이나 가을에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우린 정말 비슷하고 많은 걸 함께 하고 있다.
"이제 나가서 좀 걸어볼까?"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지수가 말했다.
"그래, 바닷가 왔는데 모래사장 한 번 밟아봐야지. 나가자."
밖으로 나오니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우릴 맞이했다. 숨이 턱 막히는 듯 한 무더위. 이 더위에도 바닷가엔 친구, 가족, 연인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에게도, 이들에게도 오늘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게 되겠지.
지수와 난 양손에 신발을 하나씩 든 체 모래사장을 걸었다. 뜨거운 햇살에 데워진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혔고 한 번씩 밀려오는 바닷물은 모래가 잔뜩 묻어있는 발을 시원하게 씻겨줬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그때 생각나? 우리 아르바이트하면서 처음 회식했던 날. 난 아직도 그때가 정말 생생하다? 그 회식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푸하하하. 야, 그날은 그냥 잊어! 내가 그날만 생각하면 진짜.. 하.. 그리고 우리가 친구가 될 인연이었다면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분명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같은 학교였으니까 교양과목 수업을 같이 들었다거나 뭐 아니면.. 네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번호를 물어보러 따라왔다거나.."
"아니 잘 나가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하하하. 아니 왜? 나 정도면 예쁜 거 아냐? 너도 나 예쁘다며? 아니야?"
"뭐야,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더위 먹은 거야? 얘가 정신 못 차리는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지수 말대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 회식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회식자리를 갖게 됐다. 새로운 직원들이 많아 어수선하니 회식을 계기로 직원들끼리 친해지라는 취지였는데 회식이 시작될 때의 어색함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나를 포함, 물류센터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군 전역 후 복학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이었고 그 외 몇 분의 아주머니와 정직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엔 센터장을 비롯한 사무직 직원들이 10명 정도 있었는데 지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출근 첫날 들렀던 카페에서 그 무더위에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눈이 동그랗고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가 센터 사무실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친 지수를 센터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내 마음속에선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뭘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버리는 나.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런 시간이 하루, 이틀 쌓여가고 있었고 첫 회식이 있었던 날,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사무직 직원들은 센터장과 관리과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젊은 여직원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현장 남자 직원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현장직 남자들 대부분이 이제 막 군대를 다녀와 말 그대로 혈기왕성한 나이다 보니 평소 사무직 여직원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나와 동갑이었던 종우가 지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사무직 직원들과 딱히 접점이 없어서 얘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회식 자리에서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술기운에 용기를 낸 종우가 갑자기 지수에게 마음을 고백해 버렸던 것이다.
고백
회식 자리에서도 내 신경은 온통 지수에게 쏠려 있었다. 평소엔 대화를 나눠 볼 기회가 없었기에 이런 자리에서라도 기회를 봐 얘기를 좀 해보려는데 당최 틈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술을 마시던 종우가 뜬금없이 말했다.
"민준아, 나 더 이상 안 되겠어. 남자가 말야. 응? 이건 아니지. 그치? 나 오늘 고백해야겠어."
"뭐? 뭘 고백해? 설마, 지수 씨?"
"응, 차이든 말든 답답해서 더는 안 되겠어. 남자가, 응? 이게 뭐야. 좋으면 좋다고 말이라도 해봐야지. 등신같이 에이.. 짝사랑은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 그냥 고백할래."
종우와 술 마시는 게 처음이라 이 녀석의 주량을 알 길이 없었는데 얼굴을 보아하니 눈이 풀려서 꽤나 취한 것 같았다. 마음속으론 말리고 싶었지만, 내가 뭐라고 이 녀석의 고백을 막는단 말인가. 아니, 그런데 혹 이 녀석의 고백을 지수가 받아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종우야, 너 지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꼭 지금 해야겠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거 어때?"
"아니야, 나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오늘 결판을 내야겠어. 내가 고백했는데 지수 씨가 노? 이러면 나도 그냥 끝이지 뭐. 남자가 응? 나 싫다는 사람한테 막 매달리고 그러면 안 되지. 남자가.."
그냥 보기에도 눈이 풀려 '나 취했어요' 하는 남자의 고백을 받는 여자는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런 걸 생각하기 전에 일단 종우의 고백 자체를 막는 게 우선이었다.
"아니야 종우야.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아. 너 안 취했을 때 제정신일 때 하자. 지금 이렇게 고백하면 안 될 거 같어."
"남자가, 겨우 이거 마시고 응? 나 안 취했어. 내가 주량이 응? 소주 5병인데 아직 반도 안 마셨다니까?"
하,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민준아 부탁이 하나 있어. 나 지금 나가있을 테니까 지수 씨 좀 식당 옆 편의점으로 데려와주면 안 될까? 내가 데리고 나가기엔 좀 그럴 거 같단 말이지. 나 지금 나가있을 테니까 네가 데리고 와주라. 알지? 옆에 편의점 있는 거. 나 거기 벤치에 있을게. 응? 부탁한다 민준아."
그러고서 종우는 바로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며 순식간에 식당을 빠져나갔다. 일단 걱정스러운 마음에 종우를 따라 나갔는데 녀석은 멀쩡히 식당 옆에 있는 편의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종우는 따라온 나를 보더니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나 안 취했다니까? 남자가.. 응? 아직 2병도 안 마셨는데. 민준아, 나 정말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지수 씨 좀 불러다 주라."
이 녀석과 아직 한 달도 체 안 되는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지만 얼핏 가벼운 친구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랬던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걸까. 내 마음도 내 마음이지만 더는 종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았어. 어떻게든 데려와볼게. 기다려. 졸지 말고!"
"고맙다 친구야. 근데 나 진짜 안 취했다니까? 남자가 응? 아직 3병도 더 마시지. 알지?"
"알았어 인마. 남자가 응? 5병 마시는 거 알겠으니까, 진짜 졸지 말고 딴 데 가지 말고 기다려. 금방 올게."
지수를 데리러 식당으로 들어가는 내 마음은 너무도 무겁고 심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