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종우야, 야 인마 좀 일어나 봐!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술에 취해 꿈쩍도 않는 종우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지만 반응이 없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의 종우가 지수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고백해야겠다 마음을 먹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리고 술은 그 용기를 지탱하고 굳게 먹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줄 묘약이었을 거다.
정신을 못 차리는 종우와 나란히 앉아 회식장소인 고깃집을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회식자리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얘를 어쩐담.'
할 수 없이 내 목에 종우의 한 쪽팔을 두르고 녀석을 일으켜 세웠다. 종우가 나보다 키가 작아 내 몸은 종우 쪽으로 꽤나 기울어졌다. 그렇게 종우를 어정쩡하게 둘러메고 식당 쪽으로 향하니 밖에 있던 석구형과 태호가 우릴 보고 뛰어왔다.
"민준아, 종우 왜 이래? 뻗은 거야?"
태호가 종우를 부축하며 물었다.
"오늘 급하게 마시더라. 저쪽 편의점 앞에서 잠들었길래 데리고 왔어. 근데 얘 집 어딘지 알아? 택시 태워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종우 나랑 가까운데 살아. 내가 택시 불러서 데리고 갈게."
옆에 있던 석구형이 대답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형이 종우 좀 잘 챙겨줘요. 회식은 마무리된 거죠?"
"어. 지금 1차는 끝났고 2차 가네 마네 하더라. 넌 어쩔래? 우리 팀 애들은 거의 다 집에 간다던데. 나도 종우 데리고 집에 가야겠고."
분위기를 보니 2차는 사무실 직원들이 주도하고 있는 듯했다. 지수도 2차를 가는 듯한 눈치였다.
"저는 집도 가깝고 하니까 조금 더 있다 갈게요."
고깃집 근처 맥주집에서 2차가 이어졌다.
물류팀은 나와 서준이가 남았고 나머지는 지수를 비롯한 사무실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수를 따라 남긴 했지만 평소 사무실 직원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대화는 대부분 업무 얘기들이었고 테이블 끝 자리에 앉아 분위기만 맞추던 난 조심스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괜히 왔나 싶은 마음으로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민준 씨."
돌아보니 지수가 서 있었다.
술을 마셔 복숭아처럼 붉어진 얼굴, 그럼에도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동자. 질끈 묶어 올린 머리.
분명 지수였다.
"여기서 뭐해요?"
지수가 말을 건네며 내 옆에 앉았다.
"술을 많이 마신 거 같아서 바람 좀 쐬고 들어가려고요. 지수 씨는요?"
지수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얼굴이 더 빨개지고 심장박동도 빨라짐을 느낀다.
"전 재미가 없어서요. 회식자리에서 업무얘긴 좀 아니지 않아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항상 무표정이었던 지수에게서 웃는 얼굴, 투덜대는 얼굴 등 많은 표정을 보게 되는 하루다.
"그러게요, 회식자리에서 업무얘긴 좀 아닌 거 같은데. 하하."
"그러니까요. 맨날 이래. 뭐 어차피 이제 곧 관둘 거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만요."
"지수 씨 퇴사해요?"
"네, 근데 아직 회사에 말은 안 했어요. 아직 여유가 있어서. 11월쯤 퇴사하고 여행 다녀와서 복학 준비하려고요."
"복학이요?"
"아, 모르시겠구나. 저 학교 휴학 중이었거든요. 어쩌다 보니 휴학이 좀 길어졌는데 이제 복학해야겠다 싶어서요."
"휴학 얼마나 했는데요?"
"작년 3월에 했으니까.. 벌써 1년 6개월 됐나 보다. 하하하. 남자들처럼 군대 간 것도 아닌데 오래 했죠?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그럼 내년 3월에 복학하는 거예요?"
"그렇죠."
"저도 내년 3월에 복학해요. 군대 갔다 와서 복학 전까지 남는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하는 거라."
"그래요? 오.. 나랑 같네요. 학교 어딘지 물어봐도 돼요?"
"전 K대학이요."
"진짜요? 어머, 무슨 일이야. 저도 K대학 다니는데! 뭐야."
"와 대박, 진짜 K대학 다녀요? 무슨 관대요?"
"전 언론홍보학과요. 민준 씨는?"
"전 경영학과요. 와 뭐야 이거. 그럼 몇 학년으로 복학하는 거예요? 전 2학년이요. 1학년 마치고 바로 군대 간 거라."
"전 3학년이요. 와, 진짜 신기하다. 잠깐만 그럼 우리 동갑이니까 학번도 같으려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전 1*학번인데, 지수 씨는요?"
"저도 1*학번이요. 뭐야, 학번도 같고 동갑이고 우리 그냥 친구네."
우리.
너와 나를 아우르는 단어. 그저 '남'으로만 느껴지던 관계에서 '우리'라는 단어로 넘어오는 순간 왠지 모를 친밀감과 훨씬 가까워진 정서적 거리를 느끼게 해주는 말.
"지수 씨 그럼 우리, 말 놓을까요?"
"그럴까요? 근데 나 말 잘 못 놓는데.. 민준 씨가 먼저 놓을래요?"
"저도 그렇긴 한데.. 그럼 제가 먼저 놓을게요. 이제 말.. 놓는다? 이렇게 하면 되..나?"
"푸하하하. 뭐야 그게!"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고 그날 밤 난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