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야기 #1

가을엔 핑크뮬리지

by J브라운




잠깐 퀴즈!!

다음 중 진짜 새가 아닌 것은?

1번 분홍쥐꼬리새, 2번 으악새

정답은?


정답은 1번, 2번 둘 다 진짜 새가 아니다.

분홍쥐꼬리새는 핑크뮬리의 우리말이고 으악새는 '억새'의 방언이다.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제목도 잘 모르는 노래의 가사 중에 '으악새 슬피 우는'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걸로 미루어 당연히 난 으악새가 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으악새는 억새의 방언으로 '으악새 슬피 우는'이란 말은 억새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표현한 거라 한다.


드디어 가을


가을이다.

내게 가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풍과 코스모스였다. 한창 감수성 풍부하던 사춘기 시절엔 가을이 오면 새빨개진 단풍잎을 책 사이에 넣어두기도 했는데 이게 얼마 지나면 빳빳하게 펴져서 앞뒤로 투명 테이프를 붙여 책갈피로 사용하거나 여기에 짧은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순수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너무나 좋아했던 가수 이승환의 '흑백영화처럼'이라는 노래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코스모스가 많이도 핀 가을날'


그렇지, 역시 가을엔 코스모스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을 하면 핑크뮬리와 억새가 가장 먼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데 SNS에 가을을 검색해 보면 핑크뮬리와 억새, 이 두 가지 사진들 천지다. 그렇담 나도 한 장 찍어주는 게 예의 아닌가.


분홍쥐꼬리새, 핑크뮬리


핑크뮬리를 실제로 처음 본 건 2019년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2년 가까이하던 맥주집을 양도하고 아내와 오랜만에 여행을 떠난 제주도에서 마침 핑크뮬리 축제를 하는 곳이 있어 갔다가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됐는데 그 예쁜 모습에 정말 놀랐었다.

핑크뮬리와의 첫 만남

하나하나 뜯어보니 옅은 핑크빛줄기들이 한데 뭉쳐 파스텔톤의 영롱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이게 또 신기한 게 눈으로 보는 것도 예쁘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훨씬 더 예쁘게 나온다는 거다. 30대 후반부터 어딜 가도 사진을 많이 찍지 않던 내가 처음 본 핑크뮬리에 홀린 듯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대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가을만 되면 꼭 핑크뮬리를 보러 나선다. 작년에는 태안에 있는 청산수목원으로 이 녀석을 만나러 갔었는데 두 번째 만남임에도 마치 처음인 듯 그 예쁘고 웅장한 모습에 또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가을의 핑크뮬리는 그저 진리다.

청산수목원 핑크뮬리

2021년 10월 16일 토요일.

올해도 핑크뮬리를 보기 위해 안성 팜랜드로 향했다. 집에서 안성까지는 60km 남짓. 누군가에게는 장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매일 출퇴근거리만 140km인 내겐 전혀 부담 없는 거리다. 문제는 날씨였는데 전날까지 비가 내린 데다 기온이 크게 떨어져 많이 추운 날씨라고 했다. 완전 야외라 햇빛이 내리쬐면 피할 곳이 없어 차라리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도착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먹구름에 해는 가려져 어둑어둑했고 황야 같은 그곳엔 바람이 강하게 불어 흡사 초겨울 같은 느낌이었다.


예상외로 추운 날씨에 놀라 걷고 있는데 아내가 전동자전거를 보더니 한번 타보자고 했다. 예전에 조금 더운 날씨에 왔을 때 걸어 다니느라 지쳐 전동자전거를 타지 않은 걸 후회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생각 나서였는지 나 역시 아내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표를 끊고 자전거에 올랐다. 직원분이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요게 나름 브레이크와 악셀이 있고 심지어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있었다. 있을 건 다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악셀을 밟고 드디어 출발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출발한 것도 잠시,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는데 추운 날씨에 바람까지 부는 데다 이걸 타고 있으니 바람이 더 강하게 느껴져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5분도 안 돼서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후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오직 직진만 있을 뿐. 우린 기본 대여시간이 30분이니 이 시간만 타고 바로 반납하기로 합의했다.


가을은 가을이다


먹구름에 해가 가려져 흐리고 바람도 강했지만 넓은 들판에 피어있는 꽃들은 정말 예뻤다. 먼저 코스모스를 볼 수 있었는데 예전 내 마음속 가을 이미지를 가득 채워주던 그 모습을 오랜만에 직접 보니 감회가 참 새로웠다. 바람에 하늘 거리는 코스모스. 귓가에 이승환의 '흑백영화처럼' 노래가 자동 재생된다.

필름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이승환의 목소리.

'코스모스가 많이도 핀 가을날..'

오랜만에 만나는 코스모스

한참 이 노래에 취해 코스모스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이제 막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보더니 하나 사 먹자 한다. 이 날씨에?

아내의 표정을 보니 안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사 먹긴 했는데 역시나 얼마 먹지 못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날이 너무 추워 손이 시리고 이도 시렸다. 난 살며시 아이스크림에서 손을 놓았는데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남은 걸 다 먹었더랬다.


코스모스를 지나 조금 더 갔더니 황화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있었다. 이 코스모스는 일반적인 코스모스 하고는 색이 좀 달랐는데 들판 가득 피어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아내와 난 연신 사진을 찍으며 가을날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런데 아내가 자꾸 사진을 찍을 때마다 카메라를 봐서 MZ세대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보라고 했더니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계는 거짓말을 못한다고 신기하게도 그 어색함이 사진에 고스란히 묻어났는데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황화코스모스

마지막으로 그렇게 고대하던 핑크뮬리를 볼 수 있었다.

역시는 역시다. 들판을 가득 메운 핑크빛 물결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절정이 좀 지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날씨가 좀 추워져서였는지 다행히 시들지 않고 아직 쌩쌩한 모습이었다. 멍하게 보고 있으려니 핑크빛 물결에 퐁당 빠진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지는 게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올해의 핑크뮬리도 참 예다.

가을엔 역시 핑크뮬리

게다가 아래쪽은 핑크뮬리, 위쪽은 황화코스모스가 피어 있어서 뭔가 느낌이 새로웠다. 핑크빛과 호박색의 표현하기 어려운 조화라고 해야 할까. 그 가운데를 걸으며 느껴지는 가을의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황화코스모스와 핑크뮬리

가을은 가을이다.

간만에 뻥 뚫린 곳에서, 게다가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사이에서 가을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참 좋았다. 날씨는 좀 추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보고 싶었던 핑크뮬리도 실컷 보고 덤으로 코스모스까지.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온 보람이 있다.

올해의 핑크뮬리도 역시나 성공적이다.


그럼 이제 새를 만나러 갈 차례인가?




작가의 이전글좋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