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뮬리와 함께 가을 하면 떠오르는, 꼭 새 이름 같지만 새 이름이 아닌 으악새.
으악새는 '억새'의 방언이라고 한다.
얼마 전 핑크뮬리를 보고 왔더니 이번엔 가을에 실로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억새가 보고 싶어졌다. 집 근처 공원에 억새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가을 억새 하면 생각나는 그곳, 상암 하늘공원으로 억새 구경을 떠나기로 했다.
본가가 서울이라 결혼 전엔 상암 쪽에도 종종 왔었는데 결혼 후엔 경기도에서 살다 보니 거리상의 문제로 이곳을 잘 찾지 않게 됐다. 마지막으로 상암에 왔던 게 2016년 1월 1일이었는데 새해 첫날의 일출을 보겠다고, 집 가까이에 일출을 볼 수 있는 곳도 많은데 굳이 하늘공원에서 일출을 보겠다며 이른 새벽부터 상암까지 왔었더랬다.
하늘공원에서 본 2016년 새해의 첫 일출물론 일출이 멋있긴 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새해의 각오를 굳게 다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날씨가 문제였다. 새벽 공기가 그 정도 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날따라 얼음처럼 찬 공기에 발이 정말 꽁꽁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혼자 땅에 발을 얼마나 콩콩 찍어댔는지..
그게 아내와 상암에 왔던 마지막이었다. 벌써 5년 전이다. 그것도 새벽에 잠깐 왔다 간 거라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마지막으로 상암에 왔던 건 결혼 전이니까 최소 10년은 더 됐다는 소리다. 경기도 촌놈이 따로 없구나 싶다.
가자! 억새숲으로
늦잠을 잔 휴일 오후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하늘공원으로 향했다. 차를 두고 지하철로 갔는데 평소 자차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 지하철을 탈 일이 많이 없어서 가끔 이렇게 이용하는 날엔 괜히 기분이 좋다. 그냥 사람들 보는 것도 재미있고 혼자 운전할 때보단 시간도 빨리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고개가 자꾸 앞으로 떨어졌다 올라왔다를 반복했다. 얼미나 피곤했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내 어깨에 기대게 해주고 싶었는데 앉은키가 거의 비슷해서 잘 되지 않았다. 내 뒤척거림에 잘 자고 있는데 왜 깨웠냐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는 아내. 난 미안한 마음을 정성껏 담아 윙크로 화답을 해줬다.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걸려 상암 월드컵경기장역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이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종종 한 번씩 와보는 곳은 대충 어디가 어딘지 감이 오는데 여기는 너무도 낯설었다. 출구를 찾아 나가면서도 여기가 어딘가 싶어 고개를 수없이 두리번거렸는데 그게 거슬렸는지 아내가 가만히 좀 있으라고 면박을 줬다. 그러면서 아내는 목이 너무 마르다고 나가자마자 물이나 커피를 마시자 했다. 위험 신호다. 유난히 아내가 많이 예민해질 때가 있는데 바로 배고플 때와 갈증이 날 때다. 이 때는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빨리 나가서 카페나 편의점 같은 걸 찾아야겠다 싶었다.
출구로 나왔는데도 뭔가 이상했다.
예전에 왔을 땐 월드컵경기장 쪽에서 구름다리 같은 걸 타고 공원으로 넘어가서 다시 하늘공원으로 올라갔던 것 같은데 나와보니 지하철 입구는 죄다 공사 중이었고 경기장 옆 공터만 휑하게 눈에 들어왔다. 길도 모르겠고 매점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아 결국 네이버 지도를 켜고 하늘공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즈음부터 아내가 점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목마름이 최고치에 다다른 것 같았다. 마스크 너머로 잔뜩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걷는 아내를 위해 서둘러 인근 매점이나 카페의 위치를 검색했다.
다행히 월드컵경기장 맞은편에 있는 평화의 공원에 카페가 있다고 해서 걸음을 재촉했더니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파라솔 아래 앉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제서야 슬쩍 아내의 얼굴을 봤더니 이제 좀 살겠다는 표정으로 커피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휴.. 역시 아내의 평화가 가정의 평화다.
커피를 다 마시고 하늘공원으로 향했다. 하늘공원에 오르는 길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계단으로 오르는 방법, 둘레길을 걸어서 오르는 방법, 그리고 맹꽁이 열차로 오르는 방법. 맹꽁이 열차의 줄은 너무 길었고 계단은 또 너무 힘들듯해서 둘레길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공기는 선선하고 햇살은 따뜻해서 적당히 그늘이 지니 걷는 것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내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공원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구경하고 나오는 사람들, 맹꽁이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제 막 올라온 사람들이 한 데 뭉쳐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지나 하늘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드넓게 펼쳐진 억새풀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림 같았던 억새의 나라
하늘공원의 억새와~
보자마자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눈이 부신 가을 햇살은 따뜻하게 이곳을 비춰주고 공원을 가득 채운 억새풀은 가을의 정취를 한 층 더해주고 있었다. 그 안에서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림 같았던 풍경아내와 난 20년을 함께 하고 있다. 연애 10년에 결혼도 어느덧 10년 차가 됐는데 함께 다닐 땐 언제나 손을 잡는다. 손발이 찬 나와는 달리 아내의 손은 너무나 따뜻해서 잡고 있으면 참 좋다. 오늘도 여전히 따뜻한 아내의 손을 잡고 우리 키보다 훨씬 큰 억새숲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예뻤다. 사진을 찍고 눈에도, 마음에도 그리고 머릿속에도 이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을엔 핑크뮬리도 좋지만 억새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더니 어느새 하늘이 붉게 물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젠 해가 짧아져서 오후 5시가 지나면 해가 조금씩 넘어가기 시작한다. 저쪽 하늘에서 해가 붉은빛을 가득 내뿜으며 서서히 지는 게 보였다. 하늘이 맑아 해가 지는 게 끝까지 보일 듯했다. 뉘엿뉘엿 지던 해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더니 이내 하늘엔 붉은 노을이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서울 하늘의 일몰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상암의 하늘해가 넘어간 하늘에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이내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사람들이 공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오늘 본 억새의 모습이, 해가 지는 상암의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대로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천천히 걸었다.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내려와 보니 7시도 안 됐는데 주위가 온통 깜깜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을이라고 해가 많이 짧아졌는데 이대로 가을이 지나가는 게 너무나 아쉽다.
가을이어서 볼 수 있었던 핑크뮬리와 억새.
계절마다 그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올 가을의 핑크빛 물결과 갈색 숲이 코로나 속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해 준 듯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을을 보내기엔 아직 보지 못한 것이 하나 더 남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단풍을 보러 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