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단지 뒤편에는 작은 산이 있다. 베란다 창문을 열면 동요에 나오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로 그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싱그러운 초록색 숲과 파란 하늘 그리고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솜처럼 가벼워져 둥둥 떠오른다.
이곳으로 이사 올 때만 해도 어린아이 키만 했던 나무들이 세월을 끌어안으며 몸피를 늘려 제법 아름드리나무로 자랐다. 아파트 담장을 끼고 산길을 따라 십여 분 올라가면 울창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어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깊은 산속에 든 것 같은 적요함마저 감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근처 유치원 아이들이 숲의 생태를 관찰하기 위해 병아리 걸음으로 올라온다. 해맑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면 더없이 즐거운 기분이 된다. 오르는 길목길목 마련된 운동기구 앞에선 어르신들의 체조 소리가 우렁차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에 산길을 걷고 있는 나의 풍경 하나를 자연스레 더한다.
은평구에서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신사동 산 93-8번지 일대에 5년 계획으로 총 1만 2400주의 편백 나무를 심었다. 2020년에는 본격적으로 편백 나무숲 조성을 위해 무장애 산책길 전망대 포토존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이 추가로 조성되어 주민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잘 가꾸어진 숲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매일 지나던 곳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푸른 산등성이가 마구 파헤쳐져 헐벗은 채로 붉은 살이 드러나 있었다. 벌건 흙 위에는 가녀린 나뭇가지들이 듬성듬성 허술하게 꽂혀 있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헉’ 하고 비명을 질렀다.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는 개발 논리에 혀를 끌끌 찼다.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뭇잎들은 축 늘어진 채로 비탈진 언덕에서 곧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 여린 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가여운 그 어린것들을 어루만지며 열악한 곳이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언덕을 푸르게푸르게 물들여 울울창창 대성하라고 빌어주었다.
가끔 올라가 볼 때마다 나무들은 조금씩 힘을 얻어 키도 커지고, 줄기도 굵어지고, 잎이 무성해지는 모습이 대견했다. 5년여가 지난 지금은 굵은 청장년의 나무로 자랑스럽게 자란 편백들을 보며 뿌듯하기까지 하다.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있으면 든든하다.
이제는 동네마다 공들여 만든 숲이나 공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발표한 지표에 따르면 도시 숲이 하는 역할로는 미세먼지나 이산화탄소 흡수, 공기 정화 및 사막화 방지 등의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네 도시 생활에 있어 숲의 가치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피부로 느껴지는 기후변화가 재난의 수준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이상고온현상’은 지구가 대기오염으로 중병을 앓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게다. 작금의 ‘탄소 중립’이라는 중요한 과제가 그 해결책으로 우선 떠오르고 있다. ‘탄소 중립’이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서 더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탄소 배출량과 탄소흡수량이 서로 상쇄되어 순 배출량이 ‘0’이 되게 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환경과 기후를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온실가스의 흡수원으로써 최상이 숲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숲을 보존하고 관리함에 힘을 모아야만 한다.
오늘도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이상고온의 폭염을 견디며 소중한 숲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체감한다. 개발이다 편리다 하며 산을 밀어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 또 인간의 도구적 가치에 따라 훼손될지는 모를 일이다.
숲 전체도 하나의 생명체일 터 더는 무분별한 개발행위로 파괴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멋지게 자라는 편백 나무를 바라보며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겸허한 마음을 안고 산을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