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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Oct 12. 2019

따뜻한 유령과 함께한 순간

대구, 고스트북스

괜찮은 듯싶다가도 이따금 칼바람이 뺨을 스치는 12월 중순. 오후 한 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간이지만, 여전히 동네는 아직 잠이 들어있는 듯 조용했고 길가 가게들의 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이따금 자전거를 탄 학생이 지나갔고,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찔러 넣은 아저씨가 발걸음을 총총 옮겼다. 이 곳 길가 모퉁이에는 하얀 유령이 그려진 간판이 붙은 낡은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의 3층에는 작은 서점이 있다. 의도한 바가 있어 굳이 고개를 들어 찾아보지 않는다면 밖에서는 채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쉽지 않을 만한 곳. 건물 출입구로 들어가 좁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반가운 입간판이 보이고, 조금 더 힘을 내면 투명한 유리문 앞에 설 수 있다.


살포시 문을 열리고 드디어 여기를 와보는구나 하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의 한 커플이 책방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둘은 멀찍이 떨어져 각자 책을 고르기 시작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는 따뜻한 색감의 에세이를 골라 들었고, 여자는 강렬한 흑백 컬러의 일러스트북을 선택했다. 책방을 상징하는 로고가 그려진 도장을 책에 찍어줄까 물어보니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워했고, 일정 금액 이상 구매고객에게 제공되는 책방 포스터를 전해주니 벌써부터 본인 집에 어디다가 이걸 붙일지 고민부터 하는 유쾌한 사람들.


어딘가 다른 곳에 가려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데, 큰 맘먹은 듯이 맥주 한 병을 시키는 두 사람. 한 사람은 잔에 다른 한 사람은 병째로 맥주를 나눠마시며 책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방금 자신이 산 책인데도 혹시나 책을 쫙- 펼치면 책등에 자국이 남진 않을까 조심스레 책을 30도만 펼쳐보는 여자. 책 한 문단에 맥주 한 모금, 책 한 문단에 창 밖 풍경 한 번, 책 한 문단에 눈을 감고 노래 한 소절을 온전히 즐기며 이 공간을 가득 담아가려는 듯한 남자. 그 옆에서 커다란 크래프트지를 잘라 배송할 책들을 하나씩 포장하는 서점 주인.


사각사각,

셋은 그렇게 한참이나 같은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작년 겨울, 대구 여행을 하면서 다섯 곳의 작은 책방을 들렀습니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고스트북스를 배경으로 제가 방문했던 순간의 모습을 살짝 끄적여보았는데요. (네, 본문에 등장하는 커플이 바로 저희 부부입니다.) 우주를 주제로 한 책들이 유독 많았고 서점 곳곳에 커다란 화분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서점의 양쪽 커다란 통창 밖으로 보이는 시원한 풍경이 서점 안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줬던 것만 같아요. 그래서 맥주가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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