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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랜맨 Oct 12. 2019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무엇부터 포기해야 하지?

딩크입니다, 아직까지는.

딩크족.

인터넷 검색창에 이 단어를 검색하면,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 Double Income No Kid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란 무엇인가 싶기는 하지만, 여하튼 맞벌이에 아이 없는 삶이라면 현재의 나를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파이어족.

여기에 대해서는 "30대 말이나 늦어도 40대 초반까지는 조기 은퇴하겠다는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는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며 은퇴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젊은 고학력 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됐는데, 이들은 '조기 퇴사'를 목표로 수입의 70~80%를 넘는 액수를 저축하는 등 극단적 절약을 실천한다.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줄여 표현한 말이다."라는 설명이 붙는다. 저렇게 극단적인 수준의 절약 생활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내 나이는 이미 30대 중반에 다다랐으니 내가 여기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무엇보다 '조기 퇴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이상향 정도로 설정해 보자.


이 두 용어에는 모두 '-족'이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민족을 뜻하는 거창한 수준은 아닐 거고, 그런 특성을 가지는 사람 무리 또는 그 무리에 속하는 사람 정도라 보면 되겠다. 소위 말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소 다른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보니 이런 접미사가 붙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나는 하나의 특이한 무리에 속해있고 또 다른 무리를 지향하고 있으니, 이번 삶에서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


하지만 위 단어들로도 내 성향이나 특성을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다. '-족'이라는 접미사를 붙이기 위해서는 무리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인원수가 필요하고, 그들을 대표하기 위한 특성을 최대한 단순화한 것뿐이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가끔씩은 나 자신을 정의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나를 사전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로, 이렇게 절감된 양육비용에 더해 소비를 줄여 조기 퇴사를 목표로 한다. 이후 모아둔 자금으로는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혼재된 작은 건물을 지어 책방을 운영하고자 한다. 주로 평일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글을 쓰며 주말에는 책방을 찾는 루틴으로 생활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일을 떠넘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지 않아서일 뿐 내가 이타적인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다. 나 편한 대로 하겠다며 어디 가서 행패를 부리거나 막말을 쏟아내지 않는 것도, 반대로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기분이 나빠서였기 때문일 뿐 전인류를 배려하거나 하는 그런 원대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니다. 결혼하기 전 부모님께 "내 결혼은 내가 모아둔 돈으로 알아서 할 테니 부모님은 모아둔 돈 까먹지 말고 알아서 잘 살으시라" 말하는 정도. 오랜만에 둘러앉은 명절 밥상에서 아이 계획은 있냐는 말에 "아직 생각 없다" 끊어내는 정도. 각자 본인 인생 알아서 잘 살자, 생각하는 딱 그 정도.


물려받은 것이 많아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의 경우에는 뭔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당연히 그것은 인생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나에게 1순위는 아내와의 시간이고, 2순위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나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아내와 산책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나중에 이런 것을 해보면 어떨까 상상하고 조금씩 준비하는 그 삶이 조금 더 순위표 위쪽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나와 아내 모두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유모차에 앉아서 세상 모든 것을 처음 본다는 듯 고개까지 휙휙 돌려가며 둘러보는 그 맑은 눈망울을,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물 웅덩이 위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는 그 앙증맞은 움직임을, 아빠의 간지럼에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그 해맑은 웃음소리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처조카와의 영상통화에서 함께 노래하며 박수를 치고, 지나가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우리도 그렇게 산다. 남의 아이도 이렇게 예쁜데 내 아이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그런 생각은 우리도 한다.


아이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듯이, 그 반대의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좇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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