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를 읽으며
당신이 고통당하고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계심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증오에 직면하여 사랑을, 죽음에 직면하여 생명을, 밤의 흑암 속에서 밝은 낮을, 악에 직면하여 선을 믿는 것, 이러한 모든 태도는 어떤 이들에게 절망적인 순박함으로 여겨지며, 간절한 마음으로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17p
대학시절 삶은 흔들어 놓은 책 몇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이다. 한참 방황에 빠져있던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에게 존재로서 용기를 알려준 내용을 담은 이 책은 그 당시 어떤 위로였을지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요 근래 더욱이 삶에 용기를 내어 보고싶은 마음이 더욱이 솟구쳐 올라서였을까? 그런 욕심이 들었으니 결국 이 책을 다시 펼쳐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용기는 씩씩하고 굳세게 나아가는 아주 단면적인 이미지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상상이상으로 더욱 큰 상상력이 필요하겠다 느껴졌다.
그렇다면 '왜 용기를 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요 근래 삶이 고통스러웠었다.'라고 아주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겠다. 많이 힘들었고, 아팠고, 세상이 무너질듯한 기분에서 헤어나오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지금도 그 과정안에서 진행중이다.. 사실 이렇게 절망스럽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을때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들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특히 힘든 상황을 잊기 위해 무언가에 쉽게 중독될 경우가 많은데, 또 그렇게 어리석은 삶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모든걸 내려 놓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반복된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라고 고민을 곰곰히 해보았다.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니 잠잠히 마음안에서 '교회로 가자.'라는 강한 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있던 통로는 사랑, 생명, 밝은 낮 그리고 선을 느끼는 것인데 그것을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장소는 교회임이 분명한 것을 지금이되서야 통찰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강제적인 자기 긍정과 지나치게 광신적인 자기 포기 모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의 비창조적인 표현인 것이다. -187p
그렇다면 또 질문할 수 있겠다. 왜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또 용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용기가 없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라고 잠잠히 고민해보니 자기 내면의 불안을 들여다 보고, 조용한 고요함 속에 잠시라도 가만있지 못하는 모습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무언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써내려간다. 물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는 인생을 쌓아가다보면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어 굉장히 좋고,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또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을 믿게 되면 그 관계안에서 중심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삶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하다. 또한 삶에 있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극복하느냐가 관건이고 그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준다. 인생에서 중심을 잡는다는게 그만큼이나 어려운데, 어떠한 방법이 가장 옳은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를 증명하는데 있어 고독함 안에서 진득히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과 삶을 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고요히 기도할고 자신을 바라볼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소리가 너무도 크게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삶의 용기를 내기 위해 교회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면 '교회를 가서 뭐가 달라졌는데?'라는 질문이 함께 따라올 수 있겠다. 사실 내 삶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달라졌다. 사실 나는 여전히 질문많은 신앙인이고, 여전히 한국 교회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이 안에서 수많은 질문과 불안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교회를 나오는 이유는 하나이다. 삶에 있어 '용기'를 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성경에서 나온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고 싶다. 물론 나는 100%인간이고 신이 될 수 없기에 같아질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그 삶을 따라갈 수 있다면 삶에서 진정한 풍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함의 불안을 떠맡는 존재의 용기는 존재의 용기가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경계 지점이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은 그저 비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형태의 용기는 그 경계선 안에서 유신론의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의 힘을 통하여 회복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225p
그래서 기독교인이 살아야 하는 삶은 정체되고 안정되기보다는 굉장히 역동적인 인생이어야 한다. 존재로서 용기를 가지게 되면 겉모습은 차분해보일지라도 내면안에서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는 삶안에서 결국 가게 될 곳은 '교회'였고 이 안에서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앞에서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게 지속가능하게 오래오래 질문하고 의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