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든 놀이터를 찾다
2019년 1월, 나는 다시 인도의 찬드라반 마을로 향했다. 이번이 일곱 번째 방문이었다. 매번 갈 때마다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번만큼 막막함과 기대감이 교차했던 적은 없었다. 전시회에서 제작했던 놀이터를 실제로 마을에 세우고 싶었지만, 그 꿈은 예산 앞에서 멈춰야 했다.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마을 아이들에게 놀이 공간을 선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난 2018년 마을을 둘러보던 중, 학교 앞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낡고 비어 있는 양계장이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났다. 벽은 갈라지고 천장은 허물어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이 마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를 놀이터로 바꿔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양계장을 놀이터로 만든다는 생각은 무모해 보였다. 단 일주일 만에 완성할 수 있을지, 그리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건 아닐까? 아이들의 눈망울에 기대를 안겨 놓고, 그 기대를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공터 한가운데 서서 낡은 양계장을 바라봤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용히 내게 물었다. "잘 해낼 수 있겠지? 내가 가는 길이 이토록 무모하고 어리석은데 괜찮겠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땅에 놀이터를 만드는 일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이 양계장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고민이 머리를 지배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낡고 비어 있던 공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모습을 상상하며 그 자리에서 작은 결심을 했다.
"일단 해보자. 무모해도, 어리석어 보여도, 이곳에 무엇이든 남겨보자."
첫째 날과 둘째 날, 우리는 놀이터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놀이터가 들어설 공터를 전체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도서관, 양계장, 학교를 돌며 부지를 조사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예산도 없었지만, 그저 손에 쥔 공업용 줄자로 허공에 꿈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래는 모르는 법. 작은 행동 하나가 언젠가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움직였다.
네 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 한국에서 가져온 공업용 줄자를 사용해 대략적인 공간 범위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부지는 생각보다 넓었고, 꼼꼼하게 측정하기 위해 이틀에 걸쳐 작업을 이어갔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옆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줄의 한쪽 끝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기차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어설픈 모습이 안타까워서일까, 아니면 함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작업 공간에 퍼지며 분위기를 환하게 밝히는 순간,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놀이 공간을 만드는 일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걸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에게 잠시 양계장 문을 열어주었다. 오래된 공간이지만 그 안은 아이들로 금세 생명력으로 가득 찼다. 뿌연 먼지가 떠다니는 구덩이 위를 뛰어다니고, 낡은 봉을 잡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티 없이 맑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웃음소리는 이곳을 놀이터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내 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문득, 속으로 다짐했다. “꼭 너희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줄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재미있는 공간으로. 너희를 끝없이 웃게 만드는 그런 곳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확신했다. 허공에 꿈을 그리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셋째 날, 부지 측정을 마친 후 양계장 내부 청소를 시작했다. 찬드라반 아이들의 안전과 위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인도에 오기 두 달 전부터 닭 냄새와 병균으로 가득 찬 이 넓은 공간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때는 ‘오르차 소방서에 전화해서 소방차를 불러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아주 커다란 물 호스를 빌려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었던 그때가 떠올라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여기는 Incredible India. 여기선 어떤 문제든 "No problem"으로 해결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수돗가에서 물을 퍼 나르기로 했다. 호스 대신 양동이, 전문가 대신 손수 몸으로 부딪히는 방법이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이곳의 아이들까지 모두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5살 남짓한 작은 아이들부터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까지 너도나도 양동이를 들고 물을 나르며 환한 얼굴로 함께했다. 아이들의 열정과 웃음은 마치 청소를 놀이로 만들어 주는 마법 같았다. 양계장은 꿉꿉한 냄새와 닭털, 쓰레기, 먼지로 가득해 처음엔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그 공간은 변하기 시작했다. 양계장 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함께 청소한 곳곳마다 꽃 향기가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가장 자신이 없었고 가장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다.
아이들의 손과 우리의 두 팔이 소방차 호스보다도 강력했다. 서로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변화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든든했다. 그날의 햇살 아래, 나는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계획이나 거대한 도구에서 오는 게 아니다. 함께하는 손길과 진심 어린 노력이, 그 어떤 어려움도 무너지게 한다.
넷째 날, 놀이터 프로젝트는 전날까지 진행한 부지 측정과 청소를 뒤로하고, 가장 기대하던 아트 퍼포먼스(Art Performance)를 시작했다. 찬드라반 마을로 가는 길에, 전날 주문한 페인트를 실은 차를 보며 설렘과 긴장이 뒤섞였다. 아이들의 손길로 양계장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일 상상을 하며, 다시 한번 이곳에 놀이터를 세우겠다는 다짐을 되새겼다.
마을에 도착해 양계장 주변 풀에 페인트가 튀지 않도록 비닐을 깔고, 아이들에게 장갑과 마스크를 나눠줬다. 그리고 도구로 사용할 붓과 롤러를 나눠주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머뭇거림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양계장을 색칠하기 시작했다. 붓, 롤러뿐만 아니라 손, 발, 심지어 온몸을 도구 삼아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냈다. 백색 벽에 곰팡이가 슬어 초라해 보였던 양계장은 순식간에 다채로운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색이 강렬한 주장을 펼치며, 그 조화는 마치 아이들 각자의 꿈이 한 공간 안에 펼쳐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양계장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버려졌던 이 공간에 아이들은 꿈과 사랑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은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이유를 상기시키며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다섯째 날, 우리는 플라잉 요가 천을 이용해 양계장 내부의 봉에 해먹을 설치했다. 성인이 매달려도 튼튼하게 버틸 만큼 단단히 묶는 데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만큼, 내부의 모습은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해먹 위에서 웃음으로 가득 찰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다.
여섯째 날은 페인트를 다시 칠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넓은 벽을 하루 만에 완성하기엔 부족했기에, 나무 막대기를 롤러에 연결해 높은 벽면까지 칠했다. 아이들의 창의력은 매 순간 나를 놀라게 했다. "이건 불가능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문제도 그들의 손에서는 금세 해결책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안의 완벽주의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낙담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에 멈춰 서곤 했다. 아이들에게 선물 같은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다짐했지만, 언제부턴가 내 기준에 얽매여 슬퍼하는 나를 발견했다.
아이들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7년 동안 나와함께해 온 아이들은, 내 얼굴과 눈빛만으로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들의 걱정은 내 불안을 비추는 거울 같았고, 그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멀리서 아이들이 페인트를 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손에 붓을 쥐고, 매순간을 즐기며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내 초라한 생각들이 무색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결과가 내 기대에 못 미쳐도,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함께 붓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시 붓을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색을 칠하며, 나를 짓누르던 생각들을 하나씩 털어냈다. 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날 드디어 찬드라반 마을 모든 사람들이 모여 놀이터 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모두가 기대하며 설레했던 그 시간이 드디어 왔다. 일주일간 온 마을이 함께 땀 흘리고 웃으며 준비했던 놀이터의 개장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놀이터 앞에는 줄을 길게 선 아이들이 문이 열리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놀이터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대와 호기심 어린 눈빛은 이 공간이 단순한 놀이터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잔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놀이터 주변을 감싸 안았다.
마침내 놀이터의 문이 열렸다. 기다리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놀이터 안으로 달려들었다. 해먹 위에 올라타며 서로 웃고 장난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희가 가득했고, 그 표정은 더 이상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확신을 내게 주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을의 어른들도 놀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은 로슨리의 할머니가 해먹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녀의 노래는 마치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연상케 했고,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 삶의 고단함이 녹아 있었고, 마음 한구석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해먹에 몸을 맡기며 부르는 노래는 이 놀이터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니라 삶의 위로와 치유의 장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놀이터를 짓겠다는 결심부터 준비하고 함께했던 과정,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시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함께 기적 같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빈 양계장은 이제 웃음과 색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꿈 놀이터로 변모했다.
이곳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언젠가 또 다른 곳에서, 놀이터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놀이터를 세우겠다고. “잘 노는 아이가 잘 큰다”라는 말처럼, 아이들이 어디서나 마음껏 뛰어놀며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놀이터는 그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꿈과 웃음을 담는 그릇이며, 마을 사람들과의 연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진실된 방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하나였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그 순간을 사랑했던 우리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놀이터를 만들고 난 후 컨퍼런스를 참가를 위해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 주의 주도 벵갈루루로 떠났다. 데칸고원 해발 950미터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연중 28도의 온화한 날씨로 나를 맞이했다. 내가 알던 ‘흙먼지 날리는 인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 벵갈루루는 내 예상과는 달리 낯설지만, 이상할 만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도시 곳곳에는 1791년 영국의 점령 시기부터 남겨진 흔적들이 깃들어 있었다. 유럽의 향기가 풍기는 건물과 거리들은 이국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덤이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어깨는 저절로 들썩였다. 머릿속에 멜로디가 흘렀고, 입가엔 콧노래가 맴돌았다.
도시 곳곳을 물들이는 그림들은 여유로웠다. 건물 외벽, 거리 한편, 벽돌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그림들까지도 도시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작품 같았다. 벵갈루루는 내가 인도에서 경험한 도시들 중 가장 ‘기분 좋은’ 도시였다. 밤이 되면 벵갈루루는 또 다른 매력을 드러냈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소한 조명이 도시를 은은하게 비췄고, 그 속에서 수많은 남녀가 짝을 지어 거리를 걸었다. 북인도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웠던 개방적인 분위기가 이 도시에서는 자연스러웠다.
한적한 밤거리의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스치자 문득 웃음이 났다. ‘아, 나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인도를 일곱 번째로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벵갈루루는 그런 도시였다. 낯설면서도 기분 좋게 나를 끌어안아 주는 곳. 차분하면서도 활기찬 그 공기가 내게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도시를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2019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인도 크라이스트 대학(Christ University)에서 열린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발표 주제와 공식 제목은 ‘From Helping to Working Together: The Practice of Social Innovation Education for the Sustainable Development of a Village in India by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였다.
7년간의 지난 활동과 놀이터 프로젝트를 정리해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내게 있어 큰 도전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려왔던 내가, 이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 준비하고 발표하니, 이것은 단순히 발표 이상의 경험이었다.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회였고, 나아가 예그리나와 찬드라반이 함께 성장할 미래를 구체적으로 꿈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발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짐했다. 찬드라반과 함께 꿈꾸는 일들은 단순히 보이는 결과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그날 밤, 벵갈루루의 선선한 바람은 마치 내게 새로운 길로 나아가라는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의 짧은 여정은 내가 스스로와 약속한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다.
“어디를 가든 놀이터를 찾는 스스로를 본다면, 어떤 길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도시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놀이터를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 어떤 상황에서도 꿈과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벵갈루루의 공기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놀이터를 떠올렸다. 그것은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였다. 어디에서든, 누구와 함께하든, 놀이터를 찾는 내가 있는 한 모든 길은 환히 열려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