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관계
내가 경험한 신학교는 참 색다른 곳이었다. 모든 것이 교육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신뢰 위에서 모든 것이 운용되었던 것도 그랬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촘촘하게 짜인 하루 일과는 지극히 타율적이었지만 기본 동력은 자율적이었다.
신학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는 곳‘이었다.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오직 이 세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교육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학교가 알아서 했다.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서면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우리를 맞았다. 기숙사 침실은 늘 잠들기 좋은 온도를 유지했다.
빨래도 해 주었다. 신학생들이 입는 모든 옷에는(속옷과 양말 빼고)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학번이 적혀 있었다. 빨래할 옷을 개인 빨래 주머니에 담아 세탁실에 내놓으면 깨끗이 빤 뒤 다림질까지 해서 빨래 주머니에 다시 담아 주었다.
세상에 신학교만큼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적어도 내게 신학교는 교육 기관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곳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아무 걱정 없이 오직 공부와 영성생활(기도)과 운동만 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이나. 운 좋게 나는 그런 시절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도 그런 복이 없었다.
불편한 생각
그런 복도, 신 앞에 선 개별 인간으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경감시켜 주지 못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주체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신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 신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신부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몰라서 그랬고, 어떤 부분은 알면서도 수용하기 참 어려웠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신학생으로서는 너무나 불편한 생각이었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인 것도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에 비해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몇 배로 차고 넘쳤으니까. 물론 양적인 차이로 진리와 거짓이 판가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쩌랴! 양적인 공격 앞에서 나의 의식은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쪽으로 맹폭을 당해 정신줄을 놓아버릴 지경이었으니.
상황이 그러한데,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여전히 신학교 안에 있었다. 세상에 나가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자신은 믿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은 개차반으로 살면서 자식에게는 착하고 훌륭하게 살라고 할 수 있는, 부모로서 가질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자세와는 다른 문제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건 아니었다. 다만 좀 다르게 신을 이해했을 뿐이다.
나만의 신님
당시, 내가 나름대로 몰래 붙인 신의 또 다른 이름은 '자연'이었다.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도 자연이다. 사람이 죽게 하는 것도 자연이다. 비가 오게 하고, 바람이 불게 하고, 해가 뜨고 달이 지게 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것도 자연이다. 이 세상에 자연현상을 비켜 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렇다면 자연이 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시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이런 생각들이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오호 통제라! 아니, 글자도 모르는 여든 할머니도 알 수 있는 그런 사실을 공부를 해서 알았다는 거요?"
물론 전혀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봐요, 당신이 하는 그런 생각이 범신론... 뭐 그 비스무리 한 것인데...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생각이라우. 아직 제대로 공부를 안 해서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인데, 공부를 제대로 해 보우.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하느님(하나님)이 아주 세세한 것까지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우."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신 앞에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 앞에서 인간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가지 현상을 놓고 '그게 공부 거리냐'와 '더 공부하면 안다'는 갈지자 비틀거림. 그 행보는 아마도 애초부터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을 감각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려 한데서 온 부작용 때문이 아닐까?
편의상 '부작용'이라 했지만 사실 종교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부작용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쉽게 말해 이단이니 사이비 종교니 하는 것은 없다. 그저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저 '나와 다르게 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 불편하게 보이거나, 나아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때 사람들은 쉽게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어떤 바보가 사이비 종교를 믿겠는가? 다른 사람 눈에는 사이비로 보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진리로 가득한 새로운 종교일 뿐이다. 지금은 기성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나 불교, 이슬람교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출발했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신이 직접 나타나 교통정리를 해 주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비감각적인 것을 감각화 했을 때의 부작용
세상에 정통이니,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말들이 돌고 있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이 감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의 대상이 아닌 신을, 감각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별 인간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관화'라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 과정 없이 신이나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주관화'라는 것이, 말은 참 멋지게 들리지만 쉽게 말하면 '중구난방'이라는 뜻이다. 좀 더 감각적으로 표현하면 '제 꼴리는 대로'쯤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 방식이다. 학문적으로 신(神) '학(學)'이니 '신 존재 증명'이니, 무슨무슨 '론(論)'이니 해서 그럴듯하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신의 문제는 완벽하게 '주관적인' 문제다. 객관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믿는 종교가 나의 주관적인 생각, 또는 믿음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란 사실, 그럴듯하고 멋지게 들리기는 하지만, 사실 이거 아주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무엇보다 신학생에게는.
일반 신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종교생활에 충실하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는 균형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신부가 누구인가? 하느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최 일선에 서 있어야 할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진리가 객관성은 없고 주관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신의 또 다른 이름이 사실은 자연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닌다? 내가 생각해도 참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랴! 내 머리를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그런 생각들이었던 것을. 3학년 복학 후, 그렇게 나의 신학교 생활은 말 그대로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