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의 음악 Dec 28. 2021

신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언어

종교와 말

제대 후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인도 배낭여행을 갔다. 해외 배낭여행이 막 시작되던 그 무렵이었다. 나는 운 좋게 인도와 네팔, 히말라야 일대를 3개월가량 여행할 수 있었다. 그때 참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인도를 두고 사람들은 '신들의 나라', 또는 '종교의 나라'라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인도는 과히 종교의 백화점 같은 나라였다. 사람들은 인도 하면 '힌두교'를 떠올리지만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종교는 힌두교뿐만 아니다. 이슬람교를 비롯해 불교, 그리스도교, 시크교, 자이나교, 배화교(조로아스트교)까지 볼 수 있다. 남인도로 내려가면 유대교 시나고가도 어렵지 않게 만난다. 


물론 어느 나라든지 소수의 다양한 종교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 용산에 가면 힌두교 사원과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모르긴 해도 찾아보면 시크교 사원이나 유대교 시나고가도 있을 것이다. 


인도는 이런 수준이 아니다. 힌두교의 나라지만 어떤 곳에 가면 도시 전체가 이슬람 모스크로 뒤덮인 곳이 있다. 북인도에서는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터번을 두르고 다니는 시크교 신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봄베이의 잘 사는 동네에 가면 곳곳에 자이나교 사원이 있다. 남인도로 내려가면 그리스도교 교회와 성당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도 서쪽의 타르 사막이나 북부의 히밀라야 문화권으로 가면 자신들만의 고유한 부족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무척 많다. 


이처럼 평소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종교를 접할 수 있는 나라가 인도였다. 게다가 구경꾼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의 종교 생활을 비교적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나라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종교란 무엇일까?'라는 조금은 원론적인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가, 종교란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언어)과 무척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의 주관성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있다. 우리말이 있고 영국 말이 있다. 이 외에도 중국 말, 일본 말, 독일 말... 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듣도 보도 못한 말도 있다. 그렇게 많은 말 가운데 어떤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쓴다. 예컨대 영국 말이 그렇다. 영국 말은 '영어'라 해서 미국 사람들도 쓰고, 호주 사람들도 쓴다. 영국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도 공용어로 영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세상의 수많은 말 가운데는 한 나라만이 쓰는 말도 있다. 예컨대 한국어가 그렇다. 한국어는 한국인들만 사용한다. 중국 말도 그렇고, 일본 말도 그렇다. 그런데 어떤 말은 한 나라에서도 쓰이지 못하고, 한 나라 안에서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만 쓰이기도 한다. 예컨대 인도의 '타밀어'라는 말이 그렇다. 타밀어란 인도 남쪽에 있는 타밀나두 주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타밀나두 주를 벗어나면 타밀어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 세밀하게 쪼개어 보면 세상의 여러 가지 말 가운데는 한 지역도 수용하지 못하고 소수의 부족 만이 쓰는 말도 있다. 히말라야 산맥의 네팔 문화권으로 들어가면 손바닥만 한 동네에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사는 경우가 있다. 그런 곳에 가보면 동네에서 쓰는 말과 집에서 쓰는 말이 다르다고 한다. 물론 영어와 한국어만큼 다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집에서는 그들 부족의 말을 쓰고, 밖에 나가면 마을 공동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이처럼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이 있고, 그중에는 넓은 지역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말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말도 있다. 문제는 세상에 영향력을 많이 미치는 말이든 그렇지 못한 말이든 말은 다 똑같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 해서 그 말이 더 좋은 말이고, 그보다 덜 많은 사람들이 쓴다 해서 덜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더 많은 사람이 쓰고, 덜 많은 사람들이 쓰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누가 쓰느냐는 것이다. 영국 말을 쓰는 사람에게는 영국 말이 중요하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한국 말이 중요하다. 영국 말이 한국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기 때문에 더 훌륭하고 더 좋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히말라야 산간 지방에서 소수의 부족이 쓰는 말보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한국 말이 더 좋고 중요하다고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쓰는 그 사람의 말이다. 따라서 어떤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이 쓰는 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쓰기 위해 자기들이 쓰던 말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릴 필요도 없다. 만약 버린다면 우리는 분명 비웃고 말 것이다.


종교의 주관성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 예컨대 그리스도교가 그렇다. 또 어떤 종교는 한 나라 사람들만 믿는 종교가 있다. 예컨대 인도의 힌두교가 그렇다. 힌두교는 인도 사람들이 믿는 종교다. 인도 땅을 벗어나면 좀체 발견할 수가 없다. 또 어떤 종교는 한 종족만이 믿는 종교도 있다. 아프리카나 히말라야 기슭의 소수 부족들은 오늘도 그들만의 종교와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더 많은 사람이 믿고, 더 부자들이 믿고, 예배소가 더 예술적이고, 신학연구가 더 활발하다고 해서 그렇지 않는 종교보다 더 참된 종교라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똑같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값지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는 힌두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역시 귀하고 값지다. 불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 자이나교도 그렇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는 소수의 종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떤 종교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느냐가 아니라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곧 그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종교는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다. 세상의 그 어떤 똑똑한 종교학자도 더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덜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언어와 종교의 주관성


세상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어떤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먹고살기도 넉넉하고 삶에 여유도 있어 자기들이 쓰는 말을 열심히 연구해 단어의 숫자도 늘이고 문법적인 체계도 제대로 갖춘 말도 있다. 그런데 어떤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여유가 없어 자기들이 쓰는 말을 연구도 못 하고 단어를 늘인다거나 문법적인 체계를 갖추기는커녕 글자도 만들지 못하고 쓰는 말도 있다.


하지만 꼴을 제대로 갖추고 쓰는 말이든, 그렇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말이든 다 같이 귀중한 말이다. 문제는 어떤 말이 제대로 꼴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말을 쓰는가의 문제다. 우리나라 말은 꼴도 제대로 갖추고 문법적인 체계도 잘 갖춘 훌륭한 말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100개도 안 되는 단어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들을 보고 "당신네들의 말을 버리고 한국어를 쓰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눈에는 그들의 말이 '말 같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한국어가 중요하고 편리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그들의 말이 중요하고 편리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어떤 종교는 그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살기에 여유가 있어 그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도 그럴듯하게 꾸미고, 신학적인 체계도 그럴듯하게 갖추어 놓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그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가난하고 여유가 없어 신학적인 체계는커녕 그들이 기도하는 예배처에 꽃도 한 송이 꽂아 두지 못하는 종교도 있다. 

나는 어떤 종교인이 자신이 신봉하는 신을 대하는 태도와 그 종교인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연관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배처를 그럴듯하게 꾸며 놓았다고 해서, 신학적인 체계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다고 해서 참 진리의 종교이고, 그들의 예배소가 촌스럽다 해서, 그들 종교의 신학이나 철학이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거짓 종교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 종교의 예배소가 으리으리하고 예술적이다 해서, 신학이나 철학이 체계적이라고 해서 참 종교이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거짓 종교라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신학도 철학도, 더군다나 예배소의 더 예술적인 감각도 아니다. 내가 쓰는 말이 나에게 맞고 소중한 것처럼 내가 받아들인 내 종교가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종교의 예배소가 더 아름답고 예술적이며, 신학도 철학도 더 세련됐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믿으니 그렇지 못한 너의 종교보다 더 참된 종교다."라고 말하면 웃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종교는 말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있다. 그런 여러 말들 중에는 어떤 말이 다른 어떤 말보다 객관적으로 더 우수하고 더 과학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쓰는 말이 내가 쓰는 말보다 더 우수하다고 해서,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쓴다고 해서, 혹은 역사가 더 오래됐다고 해서 내 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쓸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나와 다른 말을 쓰는 다른 사람을 보고, '내가 쓰는 말이 네가 쓰는 말보다 더 우수한 말이니 네 말을 버리고 내 말을 쓰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영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쓰고, 더 과학적인 말이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배우지 못해 안달이니 한국말을 버리고 영어를 쓰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불교인에게, 불교인이 힌두교인에게, 힌두교인이 이슬람교인에게, 이슬람교인이 또 다른 종교인에게 자기의 종교를 강요한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쓰는 말을 버리고 자신들의 말을 쓰라고 강요하는 것과 똑같다. 


종교는 우리가 쓰는 말과 같다. 아니 종교는 곧 말이다. 말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면 종교는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눌 때 쓰는 매개체다. 우주 전체를 놓고 보면 지구는 쌀 한 톨만 할 정도로 보잘것없다. 그런 지구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거늘, 하물며 존재의 차원이 다른 신과 인간이 나누는 말에는 그 얼마나 많은 가짓수가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신에 대한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