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정말 가난하고 싶기는 할까?
4학년 1학기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 신학교도 대학이다 보니 일반 대학에서 하는 것은 얼추 따라 했다. 내가 다녔던 대구 신학교는 수학여행 때 광주 신학교(광주 가톨릭대학)에 가는 전통이 있었다. 수학여행 첫날, 광주 신학교로 가서 점심을 먹고 4학년과 축구 시합을 한 다음 목포로 이동해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광주 신학교 4학년들도 수학여행 때 대구 신학교를 방문했다. 첫날 대구 신학교에 와서 점심을 먹고 축구를 한 판 붙은 뒤 설악산으로 갔다. 광주 신학교가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제주 교구 신학생들이 광주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제주 교구가 작아 신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학여행을 자기 동네로 가야 하는 것은 좀 거시기하다는 배려 차원에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5월 중순, 말로만 듣던 광주 신학교에 갔다. 단과 대학 치고는 캠퍼스가 넓어 무척 아름다웠다. 운동장도 잔디 구장이었다. 대구 신학교 운동장은 먼지가 폴폴 나는 맨 흙바닥이었다. 아는 신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대개 군대 생활 도중 알게 된 신학생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난한 식탁
점심시간이 되었다. 대구에서 간 우리는 여기저기 식탁으로 흩어져 광주 신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던 도중,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광경과 부딪혔다. 식사 시간마저 교육의 일부분인 것은 대구 신학교와 똑같았다. 그도 그를 것이, 광주 신학교 학장을 했던 신부님이 나중에 대구 신학교가 개교하자 초대 학장을 했으니 어련하시겠는가.
4인 식탁 한가운데 그날의 메인 요리를 담은 냄비가 놓여 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냄비였다. 양은으로 된. 한쪽 손잡이가 없었다. 냄비를 만든 작가가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오래돼서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망치로 두드리기라도 했는지 매끈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역시 작품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시멘트 바닥 같은 곳에 떨어져 찌그러진 것을 망치로 두들겨 편 것 같았다.
양은도 거의 다 벗겨져 전체적으로 희멀건 했다. 한마디로 길바닥에 내놓으면 지나던 아주머니가 '행주 삶을 때 좋겠다'며 얼른 주워 가거나, '아냐, 개밥그릇이 더 어울릴 것 같애'할 것 같은 그런 냄비였다.
고개를 돌려 다른 식탁을 보았다. 식탁 한가운데 냄비가 놓여 있는 것은 똑같았다. 다만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어디는 양은 냄비, 어디는 스텐냄비, 또 어디는 정체불명의 이상한 냄비. 공통점은 한결같이 오래되고, 찌그러지고, 낡아 대부분 개밥그릇 수준이었다는 점이다(참고로 대구 신학교에서 사용하던 냄비는 모두 스텐이었고, 새것이었으며, 모양과 크기가 완벽하게 똑같았고, 세련된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대구에 있는 미군 캠프에서 구입한 미제라고 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더 했다. 숟가락은 종이장처럼 얇고 작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사용했던'이 아니다) 그런 숟가락이었다. 젓가락도 터무니없이 짧았다. 물주전자도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였고, 물 잔은 옛날 다방에 가면 나오던 팔각 밤색 엽차 잔이었다. 그것도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었다. 그때가 1993년도였다. 당시 그런 엽차 잔은 내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다. 서울 인사동 전통 찻집에서 옛날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잔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밥을 먹고 난 뒤 나온 후식은 오이였다. 나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은 광주 신학생이 능숙하고 익숙하게 오이 껍질을 벗기더니 먹기 좋게 잘라 주었다. 후식으로 오이가 나온 것이 광주 신학교 개교 이래 그날이 처음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대구 신학교에서 먹었던 수많은 후식들을 생각해 보았다. 오이가 반찬이 아니라 후식으로 나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후식은 대개 제철 과일이었다. 봄에는 딸기가, 여름에는 포도가, 가을에는 사과 같은 것이 나왔다.
교회는 정말 가난하고 싶기는 싶은 걸까?
광주 신학교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대구 신학교가 필요 이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신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그런 혜택을 받으면서 공부하면 나쁠 것이 없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교회가 지향하는 '가난한 교회'와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참고로, 당시 광주 신학교에는 광주교구, 부산교구, 원주교구, 제주교구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담긴 음식을 먹고, 후식으로 오이를 깎아 먹으며 교육받은 신학생들과 미제 냄비에 담긴 요리를 먹고, 후식으로 딸기 같은 제철 과일을 먹으면서 교육받은 신학생들이 훗날 신부가 되어 일선 성당에서 사목을 할 때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을 수 있을까? 물론 개인의 역량과 품성 문제가 결정적으로 좌우하겠지만 살아온 환경(교육받은 환경)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성직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부유하게 살고, 즐겨 부자들과 어울리며,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하여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때가 많다. 그만큼 성직자는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가짐 못지않게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 방식에 대해서도 늘 경계해야 한다. 어떤 성직자가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고, 진실되다 해도 가난하게 살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존경받기는 쉽지 않다.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문제들이다. 또 앞으로 계속해서 문제가 될 문제들이기도 하다. 한국 가톨릭 교회를 넘어 세계 가톨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교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입만 열면 '가난'을 외치는 것이 교회다. 그렇지만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그런 삶의 태도가 신학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들 개인의 역량과 품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신학교 시절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정서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그러면서도 특별히 문제의식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제의식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여긴 면이 없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어떤 특권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생이었던 나는 미래의 지도자요, 신자들을 '다스려야 할 사람'이란 생각에 내가 누리던 분에 넘치던 대우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신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이런 것들에 대해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정면으로 직면하지 못했다. 대신 무의식적으로 회피했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던 정서적, 물질적 풍요가 너무 달콤했기 때문이리라. 결국 한 번도 제대로 된 신학생 노릇을 하지 못하고 4학년 학부 졸업과 함께 신학교에서 나오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점이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