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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Mar 21. 2022

신학교에서 지낸 비밀 제사

5.18과 1987년도에 대한 죄책감

제대 후 복학해 3학년일 때다. 그러니까 년도로 따지면 1993년도다. 제법 햇볕이 따가운 오후였다. 면학 시간이라 신학교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동기 신학생 H와 연구동(대학원생격인 5, 6, 7학년들이 생활하는 기숙사) 1층으로 갔다. 연구동은 2층부터 기숙사였고, 1층에는 강의실과 회의실 같은 다목적 공간들이 있었다. 학부생들은 연구동 기숙사에는 갈 일이 많아도(1인실 생활을 하는 선배들에게 대개 뭘 얻어먹으려고...) 1층에는 좀체 갈 일이 없었다. 자연히 어쩌다 가면 괜히 낯선 그런 공간이었다.  


신학교에는 오후에 강의가 없다 보니 학부동도 그렇지만 연구동도 강의실이 있는 1층은 오후가 되면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자연히 복도에 불도 켜놓지 않아 어두컴컴한 것이 1층만 놓고 보면 사용하지 않는 빈 건물 같을 때가 많다.  


앞서 걷던 H가 어떤 회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 반 정도 크기의 회의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절에서 피우는 향 냄새가 진동했다. 한쪽에 작은 제사상이 차려져 있고(그래 봐야 촛불과 향이 피워져 있고, 사과인지 배인지 기억이 아리송한데, 과일 몇 개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앞에 네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제사상을 향해 나란히 서 있었다. 나와 H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리가 들어서자 곧바로 제례 의식이 진행되었다. 의식이라 해 봤자 제사상을 향해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신학교 안에서 웬 제사? 

그것도 연구동 기숙사 1층에서? 

절간에서 피우는 향내를 진동시키면서? 


제사를 주도한 사람은 나와 입학 동기였던 J형이었다. J형 옆으로 선배 세 명이 서 있었다. 4학년이 두 명이었고, 5학년이 한 명이었던 것 같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아리송하다. 


J형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직장 생활도 조금 하다가 신학교에 들어왔다. 입학은 같이 했지만 나보다 여덟 살인지 아홉 살인지 많았다. 내가 군대에 갔다 오는 사이 계속 학년을 올라가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J형은 6학년이었다. 1년 뒤면 졸업해 신부가 될 상황이었다. 1, 2학년 때 J형은 나를 비롯해 많은 동기 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비슷했다. 그만큼 아직 어리기만 했던 우리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이 J형이었다.     


J형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잘 알다시피 그 시기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 정점을 향해 치달릴 때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다치고 죽었다. 그 덕분에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군사 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부터 도지사, 시장 군수까지 뽑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민주 시민으로서의 상당한 권리는 그 시절 수많은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댓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있는 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때만 해도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던 사람이 J형이었다. 



나라를 지켜 국민의 목숨을 보호하라고 쥐어준 총으로 바로 그 국민을 쏘는, 이런 일은 다시는 벌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날, 그 회의실에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지낸 제사는 5.18 연령들을 위한 추모 제사였다. 그날은 5월 17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J형은 해마다 5월 17일이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는 동료들과 함께 지냈고, 신학교에 오고 난 뒤부터는 혼자서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생각을 같이 하는 동료 신학생들을 몇 명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날 그 제사에 참여하게 된 사연이다.  


제사상을 향해 절을 하던 그때, 1987년 6월의 어느 날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에 일어났다. 내가 중학생일 때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줄곳 경상도에서만 자랐던 나다. 당연히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1987년은 상황이 달랐다. 1987년, 나는 신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이른바 6월 항쟁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최선을 다해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6월 항쟁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했을 6월 10일 즈음, 나는 무척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6. 10 항쟁과 나의 기말고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벌어졌다. 당시 박종철의 나이는 겨우 21살이었다. 나보다 세 학번 빠른 나이였다. 그가 무슨 어마 무시한 죄를 지었길래 고문 도중 죽어야 했을까?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자.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박종철은 사회참여 성격이 강한 <사회사상연구회>란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학생 운동을 시작한다. 이듬해 2학년 때는 언어학과 홍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5월에 벌어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지원 시위에 참가한다. 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5일을 살았다. 6월에는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자-학생 연대 투쟁'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어 또 구류 3일을 살았다. 


1986년이 되었다. 박종철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청계천 피복 노동조합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고, 붙잡혀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운명의 1987년이 밝았다. 1월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던 새벽.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게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를 당한다. 연행 이유는 서울대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박종철을 폭행하고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가했다. 그 고문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연행된 지 10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이 팩트다. 그 어디에도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행당하고 전기와 물고문을 당해야 할 정도로 잘못한 행동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죽어야 했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의 죽음으로 1987년 한 해 수많은 대학생들이 강의실이 아니라 길바닥에서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악랄했던 군사 독재 정부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6월을 맞이했다. 운명의 6월 10일. 그날은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짝꿍 노태우를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로 한 날이다. 그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강의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열었다. 국민들의 저항은 엄청났다.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당을 장악한 노태우는 국민의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해 다양한 민주화 조치를 보장하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 선언(일명 6 · 29 선언)>을 내놓았다. 역사는 이를 두고 국민의 승리, 라고 표현했다. 그 승리의 주인공들은 그 누구도 아닌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목숨 값이었다(6월 10일, 연세대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6월 29일 노태우 선언 당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7월 5일,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숨졌다).


그런데 나는, 나를 포함해 신학교 1학년부터 7학년까지 우리 모두는 그 시간에 숨 가쁘게 시험공부를 했고, 초 긴장 상태에서 기말고사를 치렀다. 세상 일에 참 무관심했다. 그날, 5.18 연령들 앞에서 절을 하면서 1987년 6월이 문득 떠올랐던 것은 그 시절에 대한 죄책감이었을까? 


종교인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도 안 될 것이다. 사회적 불의에 침묵해서도 안될 것이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의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 말고, 도대체 교회가 이 땅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나의 신학교 생활은 약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는 삶과는 무척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궤적을 그리며 신학교 생활을 한 내가, 모든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사제가 되었을 때 약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사회적불의에 항거하는 사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런 것을 몸소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늘 가까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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