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조인하자는 거지?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케티는 옷을 훌러덩 벗었다. 순식간에 회색 면티에 흰색 삼각팬티 차림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 나는 투명인간이거나 동성의 친구이거나, 속옷 차림의 여자를 보고도 아무런 심리적, 동물학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번외 남자 인간쯤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참 난감했다. 그 와중에 나도 반바지와 반팔 면티로 갈아입었다.
방 안에 따로 의자가 없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뒤, 케티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주로 자신이 여행했던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럽과 동남아시아는 거의 다 가 본 것 같았다. 기회가 되면 중국을 통해 한국과 일본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영어가 유창한 케티가 주로 말을 했고, 나는 들었다. 내용을 다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라 케티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어 대화에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로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케티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두유 원트 조인 위드 미?”
순간 내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두유 원트 조인 위드 미‘를 못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원트는 분명 원트는 want일 것이고, 조인은 join일 텐데... 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뭔가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해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조인‘이란 말을 듣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내가 그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러 가지 상황과 현장 분위기 때문이었다.
젊은 남녀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 면티에 삼각팬티만 입은 여자와 반바지에 역시 반팔 면티를 입은 남자. 밤은 깊었고, 그곳은 서로의 나라도 아닌, 제 3국의 오지에 있는 롯지 2층 구석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도 남자가 음탕한 마음을 먹고 한 번 떠보려고 내던진 말도 아니고, 여자가 대 놓고 그런 말을 했는데 그 ‘조인’을 ‘그것’ 말고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굳이 ‘조인’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케티와 나는 만난 지 겨우 예닐곱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겪어 본 케티는 낯선 남자와 함부로 ‘조인’을 남발할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는 여자들이 한 번 보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조인을 하고 싶어 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뭔가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동가숙 서가식 하듯 여행하던 터라 몸은 비쩍 말랐고, 수염은 덥수룩했다. 만약 그 몰골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면 영락없이 노숙자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 내게, 케티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뭐가 아쉬워 조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겠는가?
나는 ‘조인’을 ‘사흘 뒤에 같이 갈래?’라는 말로 ‘알아듣고’ 싶었다. 내가 그런 어려운 생각을 해 낸 것은 까닭이 있었다. 서로의 일정을 이야기하다 보니 케티는 바다미에서 사흘을 머문 뒤 함피라는 곳으로 갈것이라 했다. 나도 함피로 갈 계획이었지만 그 전에 아이홀레라는 작은 동네를 거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흘 뒤에는 헤어질 운명이었다. 누군가 여행 코스를 변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조인’이란 말을 사흘 뒤 ‘함피로 같이 갈래?’로 알아듣고 싶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웬?’이라고 물었다. 그러자 케티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좀 거친 목소리로(내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나-우!”하더니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다. 분명 씻는 소리였다.
‘오 마이 갓!’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두유 원트 조인 위드미?’
‘웬?’
‘나-우!’
(후다닥! 화장실 들어가서 씻는 소리)
아, 이 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케티는 제법 오랫동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케티가 벌거벗은 몸으로 화장실에서 나올 것 같았다.
‘나도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마워 케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이거였어.’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케티’
‘케티, 고맙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네가 정 원한다면...’
아,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그 짧은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잠시 뒤 화장실 문이 열리고 케티가 나왔다. 다행히 케티는 들어갈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나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케티는 다시 침대에 올라와 앉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심장이 콩닥콩닥 했다. 차마 케티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사시 눈을 한 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케티는 작은 손가방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페이프 담배였다. 네모반듯한 비닐 케이스에 껌종이만 한 하얀 종이와 담배가루가 들어있는 그런 담배였다. 한국에는 그런 담배가 없었지만 인도에는 흔했다. 호기심에 한봉지 사서 피웠던 적이 있는 바로 그 담배였다.
케티는 종이를 한 장 뽑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담배가루를 정성스럽게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돌 만 뒤 침을 묻혀 마무리했다. 검지 손가락 길이쯤 되는 담배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케티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내게 내밀었다. 피우라는 뜻 같았다.
“괜찮아 케티, 안 피울래.”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원래 나는 엄청난 골초였지만 당시 한 달 정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져 잠시 담배를 끊고 있던 참이었다. 케티는 어수룩해 보이는 동양 사내가 쑥스러워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권했다. 담배는 연기를 내며 조금씩 타 들어가고 있었다. 자기 침을 발라가며 정성스럽게 말아 준 담배인데 계속 사양하면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담배를 받아 한 모금 피웠다.
한 달 만에 피우는 담배다 보니 머리가 핑 도는 것이 어질어질했다. 한 모금에 몽롱한 얼굴이 되어 있는 나를 보고 케티가 담배를 달라고 했다. 내가 담배를 건네주자 케티는 행복한 표정으로 한 모금 피웠다. 그러더니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서양 애들은 담배도 참 희한하게 피우는구나’
우리는 그렇게 담배 한 가치를 사이좋게 나눠 피웠다. 고등학교 때 담배 한 가치를 어렵게 구해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피우던 그때 이후 실로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돌려 피우는 담배였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라 그런지 맛이 좋다기보다 머리만 아프고 속이 메스꺼운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우리는 다시 뒹굴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여행이었고, 말을 하는 사람도 여전히 케티였다. 케티는 몇 번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듯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케티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 오해를 한 것인 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케티는 몇 번 더 담배를 말았고, 불을 붙인 뒤에는 꼭 내게 먼저 권했다. 그리고 사이좋게 나눠 피웠다.
그날 밤, 우리는 끝내 ‘조인’을 하지 않고, 그냥 각자의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습관처럼 6시에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케티는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