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미 박물관에서 본 트리무리티 상
바다미 이틀째. 숙소 근처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식당 주인 사내에게 자전거를 빌리고 싶다고 말했다. 사내는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한 젊은이가 자전거를 거꾸로 엎어 놓고 열심히 고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사선으로 도로를 가로질러 자전거포로 갔다. 워낙 작은 동네다 보니 외국인 '커플'이 왔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20대로 보이는 자전거포 사내는 싱긋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자전거를 빌리고 싶다고 하자 가게 뒤쪽으로 가더니 우리나라 70년대 스타일의 자전거 두 대를 갖고 왔다. 해지기 전까지 돌려주면 되고, 값은 한 대 당 6루피(150원 쯤)라고 했다. 도시의 반 값밖에 되지 않았다. 보증금 같은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탄 것이 고등학교 때라며 약간 당황해하던 케티는 몇 번 뒤뚱거리더니 이내 능숙하게 탔다. 우리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다미 박물관이었다. 원래 나는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박물관보다는 시장이나 도시의 뒷골목을 좋아했다. 그런 곳에서 보는 사람들의 일상이 박물관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전날의 동굴 신전도 그렇고, 박물관 역시 케티가 추천한 코스였다.
사거리를 벗어나자 저만치 나지막한 언덕 위에 박물관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주 작았다. 초등학교 교실 두 개를 붙여 놓은 것 만했다. 박물관은 작았지만 바위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양 옆으로 버드나무처럼 키 큰 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 마치 달력에 나오는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케티의 눈에도 박물관이 멋있게 보이는지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기 휴일이란 안내판이 문에 걸려 있었다.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못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더 들어가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케티는 나보다 더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케티는 손으로 눈가리개를 하고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때였다. 저만치에서 하얀 롱기(치마처럼 보이는 인도 남자들의 전통옷) 차림의 인도 아저씨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함마드 알리처럼 생긴 아저씨였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우리를 본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다짜고짜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더니 박물관 관리인이라고 했다. 생긴 것과 달리 유순한 사람이었다. 정기 휴일이지만 특별히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며 손에 쥐고 있던 열쇠 뭉치를 흔들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아저씨는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힌두교의 삼위일체상
박물관은 정말 작았다. 볼 것도 별로 없었다. 물론 낮은 수준의 나의 안목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소장품 자체가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케티도 실망했는지 박물관 소장품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관리인이라는 인도 아저씨와 열심히 이야기 중이었다. 그래도 나는 재미난 것을 하나는 볼 수 있었다. 힌두교의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트리무르티 상이었다. 트리무르티 상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듣고 사진으로 본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실제 조각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트리무르티는 ‘세 개의 형상Three Forms’이란 뜻이다. 세 얼굴이 하나로 조각되어 있었다. 정면에 브라흐마가, 좌우에 시바와 비슈누의 옆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이 세 신은 힌두교의 주요 신이다. 브라흐마는 우주의 창조에, 비슈누는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는데, 시바는 그 우주를 파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 세 신이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브라흐만'이라는 인격신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힌두교의 삼위일체 교리라고 간단히 알아들을 수 있다(크리스트교의 삼위일체와는 다른 점이 많다).
‘삼위일체’란 말을 들으면 대개의 경우 크리스트교의 삼위일체가 떠오른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은 메시지다. 합리적으로 볼 때 우선 모순이기 때문이다.
‘셋이 하나다?’
아주 간단히 성부는 하느님이고, 성자는 예수, 성령은.... 글쎄, 원래 신약성서 원문인 희랍어에는 'πνεῦμα(프네우마)'라 해서 우리말로 하면 '혼' 정도로 알아들을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는 성령을 'Spiritus Sanctus(스피리투스 쌍투스)'라 표현했다. '성스러운 혼'정도로 알아들을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 영어로는 ‘The holy Spirit'라 표현하는데 모두 비슷한 의미다. '성령'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교리 설명을 그대로 옮기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동등한 본질을 지닌 특별한 신적 인격체‘로 되어 있다.
한편, 가톨릭 교회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를 잇는 연결고리로 이해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고 본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교리가 오늘날처럼 '믿을 거리'로 정립된 것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기원후 318년) 때다. 예수가 죽고 난 지 300년쯤 지난 뒤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예수가 죽고 300년 뒤에 정립되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전에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이야기다.
예수의 활약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의 제자들 또는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에 의해 예수의 신격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AD 3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는 비교적 신원이 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다소 '황당한' 출생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고, 마리아란 이름의 어머니도 있었다(물론 성서를 바탕으로 믿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성서 외에 예수가 등장하는 역사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자기들과 똑같이 뼈와 살을 갖고 있던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당시 체재에 저항하다 십자가형을 당해 죽고, 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에 저항했을까?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신에게 직접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신에게 뭔가 긴요하게 부탁할(기도) 일이 생기면 신전으로 달려가 사제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사제는 그 사람의 부탁(기도) 내용을 듣고 신전으로 들어가 신에게 기도를 하고, 신의 응답을 그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 이것이 신탁神託이다.
이런 상황을 놓고 당시 사제들은 자신들이 신과 인간의 중재자라고 했다. 예수는 바로 그 점에 저항했다. 예수는 신전의 사제들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만남을 막는 훼방꾼이라 했다. 예수는 신전의 사제를 거치지 않고 신에게 곧바로 기도 할 수 있도록 사제들에게 비켜나라고 요구했다. 예수 시대 최상위 기득권자들이었던 사제들이 그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반대로 일반 사람들은 열광했다. 신전의 사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에게 기도를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기쁜 소식,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었겠지만 신정일치 사회였던 당시, 예수의 주장은 체재에 도전하는 말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 대가는 십가형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누구라도 신에게 직접 기도할 수 있다는, 그래도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준다는 복음을 전해 주고 33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예수는 얼마 뒤 부활했다는 놀라운 소문이 나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승천) 소문도 나돌았다.
교회의 출현
그렇게 예수는 사람들 곁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기쁜 소식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했다. 이제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신전으로 달려가 신보다 더 무서운 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자기 집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거나, 동네 사람들과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다가 큰 무리로 발전했다. 모두가 힘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무리가 커지면 힘을 갖게 된다. 그렇게 그 무리는 점점 세력화되었다.
무엇이든 세력화되면 정치적이 된다. 정치꾼들은 그런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더 강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새로운 권력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믿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믿어도 된다고 선포했다. 이것이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정확히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외웠던 ‘밀라노 칙령’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시민들에게 ‘그것’을 믿어도 된다고 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392년에는 아예 국교가 되어 ‘그것만 믿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크리스트교다.
삼위일체의 필요성
다시 삼위일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로마 시민들에게 크리스트교만 믿으라고 한 이상, 이제 예수를 좀 더 평가절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다행히 예수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해 ‘부활’했느니 ‘승천’했느니 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은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멍석은 충분히 깔려있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를 신과 동등한 위치로 자리매김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미 그들에게는 조상 대대로 믿고 섬겨온 신이 있었다. 야훼 하느님이 바로 그 신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해도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머리 좋은 정치꾼들이 찾아낸 것이 '아버지 야훼 하느님과 아들 예수'라는 논리였다. 야훼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아들로 표현함으로써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영향력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성서에도 예수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 아버지 야훼 하느님의 오른쪽인지 왼쪽인지에 앉았다는 표현도 있으니(마르꼬 복음 16장 15절) 앞뒤가 잘 맞아떨어지는 셈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아버지와 아들인 이상 서열 관계가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다. 이 둘의 역학적 관계를 재설정하지 않으면 예수는 언제까지나 아들로서, 아버지 야훼 하느님에 비해 2류 신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훼 하느님과 예수를 동격으로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무리수를 두었다.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 예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곧 아버지라고 했다. 순식간에 족보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명쾌하게 교통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갖다 붙인 것이 성령이다. 거룩한 영으로 인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가 되고, 아버지가 곧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논리다.
'셋의 등장'은 당시 낯선 것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창조의 신 아톤과 태양의 신 라, 우주 섭리의 여신 마트가 삼위일체를 이룬 하나의 인격신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런 이야기를 크리스트교가 슬쩍 빌려와 삼위일체 교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근원이야 어찌 되었던 삼위일체 교리는 크리스트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 잡았고, 덕분에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일약 야훼 하느님과 동격이 되었다.
예수가 야훼 하느님과 동등해졌으니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더 신이 났을 것이다. 듣기만 했을 뿐 본 적은 없는 야훼 하느님보다는 어디서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상세히 알고 있는 예수가 훨씬 더 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또 살아생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적어 놓은 성서까지 있었다. 그런 예수가, 좀 위대한 정도가 아니라 야훼 하느님의 아들이자, 야훼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을 가졌다고 하니 사람들이 믿기 좋을 만한 요소를 다 갖춘 셈이 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크리스트교는 유럽을 중심으로 아주 빠르게 퍼져나갔다.
'잘 모르겠다'가 정답
삼위일체 교리는 처음부터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만큼 받아들이면 된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나는 신학교를 다녔고,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렇지만 사실 삼위일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삼위일체에 대해 좀 골똘히 생각해 본 것은 인도에 온 뒤부터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트리무르티 상이다. 트리무르티 상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케티는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오더니 ‘별로 볼 게 없네’했다.
박물관에서 나온 우리는 바다미 읍내로 돌아갔다가 이번에는 북쪽으로 향했다. 12월의 인도는 햇볕은 따가웠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것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찻집이 나오면 차를 마시고, 유적지가 나타나면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했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해 질 무렵 숙소가 보이는 사거리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