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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Mar 29. 2022

바다미 박물관

참 역동적이었던 작은 마을

바다미는 몇 시간만 걸어 다니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지만 543년∼753년까지만해도 인도 중부 테칸 고원 일대에 들어섰던 찰루키야 왕조의 수도였다. 그때 이 왕조의 지도자들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힌두 신전들을 앞다투어 지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굴 신전이었다. 바다미 읍내를 벗어나 협곡을 따라 200미터쯤 걸어 올라가지 1동굴이란 팻말이 나왔다. 케티가 들고 있는 가이드북을 슬쩍 보니 동굴 신전은 모두 4개인 것 같았다. 


인도 사람들이 한참 바다미에 동굴 신전을 짓고 있을 당시, 한반도는 삼국 시대였다. 한반도에 삼국시대 유적지가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것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 있는 유적은 얼마나 될까?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불국사 석굴암을 빼고 나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바다미 동굴 신전을 둘러보면서 놀랐던 것은 지어진 연대도 오래되었지만 보존 상태가 완벽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18개의 팔로 요란하게 춤추는 시바상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인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켈커다(콜카타)에 있는 인도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이라는 인류 문명 발상지가 두 곳이나 있는 데다 역사가 오래된 나라다 보니 볼 것이 정말 많았다. 소장품이 너무 많다 보니 복도에도 뿌옇게 먼지가 낀 유리 진열대가 놓여 있고, 그 안에도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식 진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복도로 밀려난 것들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처음부터 부족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자기류부터 철기류까지 다양했는데, 대부분이 기원전 것들이었다.      


인도 서쪽 사막 지역으로 가면 자이살메르란 작은 사막 마을이 나온다. 인도 최서단인 곳인데, 그곳에 자이살멜 성이 우뚝 서 있고, 이 성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자이살멜 성은 기원후 11세기경에 지은 성이다. 그러니까 1천 년이나 된 성이다. 그런데 당시 그 성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성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텐데 자이살멜 성 안의 좁은 골목을 따라 곳곳에 구멍가게가 있고, 염소 새끼들이 아무 데나 똥을 싸면서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인도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6∼7세기에 지은 바다미 동굴 신전의 조각상이 엊그제 마무리를 한 듯 깨끗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치 수학여행 간 중학생처럼 건성건성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런 면은 케티와 내가 아주 잘 맞았다. 그녀 역시 인도의 오래된 유적지에 신물이 나기라도 했는지 그렇게 감탄하며 보는 것 같지 않았다.      



8개의 팔로 현란하게 춤을 추는 시바상. 바다미 동굴 신전의 조각상들은 1500년 전에 조각된 것이지만 마치 어제 작업을 마무리한 것처럼 보존상태가 좋았다. 


우리는 어둑해질 무렵에야 숙소가 있는 사거리로 돌아왔다. 우리가 묵는 롯지가 빤히 보이는 길거리 찻집에 앉아 레몬 소다수를 마시며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종아리를 주물렀다. 숙소에 배낭을 풀어놓자마자 뛰어나와 몇 시간이나 걸어 다녔으니 다리가 제법 묵직했다.      


“케티, 내일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면 어때? 자전거 탈 줄 알지?”

“자전거야 탈 줄 아는데,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어?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10루피만 주면 하루 종일 빌려 탈 수 있을거야. 여긴 시골이니 더 쌀지도 몰라.”     


인도에는 소가 많다.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소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바로 개다. 인도 어딜 가나 개가 많다. 묶여 있는 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들 들개처럼 자유롭게 쏘다닌다. 다행히 인도 개는 순해 사람을 향해 짖거나 위협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인도에서 개는 소보다 10배 정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개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바로 자전거다. 인도의 자전거는 개보다 100배쯤 많을 것이다.      


자전거가 얼마나 많은가 하면, 4차선 넓이쯤 되는 도로 양방향이 자전거로 꽉 막혀 교차로가 엉망진창이 된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당나라 군인 같은 늙수그레한 인도 경찰 서너 명이 나타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자전거 교통정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양방향 소통이 될 정도였다고 하면 자전거의 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부 산악 지대나 중부의 데칸고원 지대로 가지 않는 한 인도에서 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원뿔 기둥처럼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가 가끔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오르막이 없다. 따라서 자전거 타기는 그 어느 나라보다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는 나라가 인도였다.  


땅은 한없이 넓고, 나라는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제 몸에서 생산 가능한 에너지가 전부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아주 유용한 이동 수단이니 자전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돈에 별 여유가 없는 배낭족이다 보니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다. 좋았던 것은, 어느 도시를 가든 자전거를 쉽게 빌려 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전거가 많다 보니 자전거 수리점도 많았다. 그런 곳에서 쉽게 빌릴 수 있었다. 다만 워낙 좀도둑과 좀스런 사기꾼이 많은 나라다 보니 자전거값에 맞먹는 보증금을 맡겨 놓거나, 여권 복사본을 맡겨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케티와 나는 소다수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어둑해질 무렵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탈리(인도 백반) 두 개를 시키자 외국인이라고 아이들 소꼽장난감같은 숟가락 두 개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내 손이 얼마나 더러운 것을 많이 만지고 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처럼 손으로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숟가락을 물로 한 번 헹군 뒤 이런저런 반찬을 넣고 살살 비비기 시작했다. 


케티는 밥 위에 몇 가지 반찬들을 얹더니 손으로 슥슥 비볐다. 그러고는 인도 사람들처럼 손가락 네 개를 붙여 밥을 뜬 뒤 엄지로 밀어 입에 넣었다. 인도 사람들이 손으로 밥 먹는 모습을 보면 밥맛이 떨어질 때가 많았는데 예쁜 케티가 그렇게 먹으니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분명 편견이었지만 내 몸이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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