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리 원 룸에 짐을 풀다
예상했던 대로 바다미는 무척 작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한 뼘 정도 남은 해가 사방에 오렌지색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온 사방이 고요했다. 문명의 소리라고는 방금 우리가 타고 온 버스 엔진 소리가 유일했다. 버스가 시동을 끄자 갑자기 깊은 산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손바닥만한 버스 스탠드에서 몇 걸음 걸어 나가자 넓은 사거리가 나왔다. 방금 버스를 타고 지나 온 곳이었다. 분명 도로였지만 차는 한 대도 다니지 않았다. 넓은 도로를 차지한 것은 온통 사람들이었다. 도로를 차지한 그들의 걸음걸이는 무척 당당해 보였다.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나더니 사거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오토바이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누른 황토 먼지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흙먼지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오토바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만들어낸 황토 먼지를 즐기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간혹 빨갛고 노란 사리를 입은 여자들이 보이긴 했지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약속이나 한 듯 흰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게다가 마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사람들같았다. 사람이 사는 진짜 동네라기보다 영화 촬영을 위해 임시로 만든 세트장 같았다.
케티는 나의 도움을 정중히 사양하고 두 개의 배낭을 앞뒤로 매고 씩씩하게 걸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첫 번째 롯지(우리식으로 하면 여인숙 쯤 된다)로 들어갔다. 팔자 콧수염을 기른, 신밧드의 모험에 나오는 사람처럼 생긴 아저씨가 우리를 맞았다.
“두유 해브 룸?”
“노우, 풀!”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롯지로 갔다. 달마대사처럼 배가 남산만한 인도 아저씨가 카운트에 앉아 있었다
“두유 해브 룸?”
“노우, 풀.”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달마 아저씨는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건너편 롯지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한 마디 덧보탰다.
“헬로 브라더, 저기 빈 방 없으면 다른 마을로 가야 해. 여긴 롯지가 딱 세 개 밖에 없거든. 행운을 빌게.”
나와 케티는 먼지가 폴폴나는 황톳길을 건너 맞은편 롯지로 갔다. 낡은 2층 회색 건물이었다.
“나마스테, 두유 해브 룸?”
“예스, 위 해브 룸. 밧, 온리 원.”
젊잖게 생긴 롯지 아저씨는 나와 케티를 번갈아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서양 여자와 동양 남자, 한 방을 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까?
“온리 원 룸?”
“예스, 예스, 온리 원 룸”
케티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다 듣고 있었으니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확인을 위해 뭐라도 말해야 했다.
“어쩌지?”
“왓 프라블럼? 노 프라블룸!”
인도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예스, 노, 탱큐, 프라블룸?, 노프라블룸, 이 다섯가지 말만 알면 인도 여행이 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인도 사람들은 프라블룸이란 말을 전라도 사람들의 거시기 만큼 썼다.
<론니 플래닛>과 <세계를 간다>
종업원이 안내해 준 방은 제법 넓었다. 깨끗한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더블 침대가 아니라 1인용 철재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케티는 마치 긴 여행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옷을 훌러덩 벗더니 회색 면티와 노란색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안, 여기 유명한 동굴 신전이 있어. 얼른 가보자.”
옷을 갈아입기 바쁘게 케티는 약간 떨뜬 표정을 짓더니 나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바다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케티는 바다미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케티가 들고 다니는 『론니 플래닛』이란 영문판 가이드북에 바다미에 대해 짧지만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때만해도 한국인이 쓴 인도 가이드북이 없었다. 인도 가이드북은 고사하고 한국인이 쓴 나라별 가이드북이라곤 일본과 미국 뿐이었다. 나머지 국가들은 ‘유럽 16개국’, ‘동남아 7개국’처럼 한 권에 모아 소개하는 식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내가 인도에 대해 얻은 정보도 『동남아시아 7개국』이란 가이드북 맨 끝에 20페이지 쯤 소개 되어 있는 ‘인도편’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보로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도 ‘인도편’을 달달 외우다시피 하며 여행을 준비했다.
인도에 들어가서야 한글로 된 인도 가이드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글로 되어 있을 뿐이었지 한국인이 한국인을 위해 쓴 가이드북은 아니었다. 일본의 ‘다이아몬드’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세계를 간다』라는 가이드북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시리즈를 한국말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세계를 간다』 시리즈는 70여 개국이 나와 있었다. 그 중에 인도도 있었다. 300쪽이 넘을 정도로 전문 가이드북이었지만 내 눈에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마 달리 대안이 없다보니 인도를 여행하다 만난 한국 여행자들은 모두 그 가이드북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인도에서 그 책을 구할 수도 없었거니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면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서양 배낭족들은 한결같이 『론니 플래닛』인도편을 들고 다녔는데 해마다 업그레이드 된다는 그 가이드북은 당시 깨알같은 글자에 2단 편집인데다 500쪽이 넘을 정도로 방대한 정보를 자랑했다. 케티는 바로 그 가이드북을 갖고 있었다. 그런까닭에 케티는 바다미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케티와 나의 바다미 여행은 온리 원 룸에 배낭을 내려 놓자 마자 곧바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