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꺄 나메 까해?
프랑스에서 왔다는 금발의 그녀. 목소리가 작고 차분해 수다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지만 말은 제법 많았다.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라 하자 무척 놀라워했다.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했다. 너무 '동안'이라고 했다.
세상에나, 내 나이보다 나를 어리게 본 사람은 태어나 그녀가 처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내 별명은 ‘오팔 개띠’였다. 친구나 선배들은 줄여 '개띠'라고 했다. 때로 '개장수'로 확장 변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990년대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끼리 통성명이라도 하고 나면 서로 ‘저는 무슨 띱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때 난, ‘오팔 개띱니다’라고 하기 좋아했다. 물론 농담이었고, 나는 오팔 개띠보다 열 살이나 어리다. 그런데 나는 농담으로 했는데 상대방은 진짜 믿는 눈치일 때가 많았다. 스물 두서너 살부터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녀도 자연스러웠을 정도로 얼굴이 받쳐 주었으니 나의 노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금발의 그녀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동안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물론 우리가 외국인들의 나이를 잘 가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금발의 그녀가 그런 엉뚱한 반응을 했다는 것, 나중에 알았다.)
버스는 허허벌판을 털털거리며 달렸다. 제대로 붙어 있는 창문이 몇 개 없어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와 무척 시원했다. 20여 명쯤 되는 승객들은 띄엄띄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와 금발의 그녀는 세 명이 앉게 되어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갔다.
금발의 그녀는 영어를 무척 잘했다. 지금은 국제화 시대라는 것이 실감 날 정도로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서양 사람이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영어를 잘 하지만 그때만 해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이라 해도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영어를 했다.
“아버지가 영국 사람이야.”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는 내 질문에 금발의 그녀가 한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잠시 딴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참 좋은 사람이야. 나와 사이가 아주 좋았거든.”
묻지도 않았는데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조금 당황했다. 내가 알기로 서양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금발의 그녀는 나와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이름만 알려준 사이였다.
인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비자푸르에서 바다미까지는 10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하면 제법 먼 거리지만, 인도에서 100킬로미터는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그런데도 4시간이 더 걸렸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아무데서나 손을 드는 사람이 있으면 태우고, 내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서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 지평선과 평행을 이루며 버스는 열심히 달렸다.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도 익숙해져 고요함마저 느껴졌다. 나와 금발의 그녀는 말없이 창밖만 쳐다보았다. 한 노인이 혼자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서 혼자 모내기하는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자기의 허물을 씻어내기 위한 속죄 행위처럼 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노인을 가리키자 금발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그런 의미였을까?
“난 이번 인도 여행이 다섯 번 째야. 스무 살부터 해마다 인도 여행을 하고 있어. 근데 좀 전에 사실 좀 부끄러웠어.”
금발의 그녀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그렇게 말했다. 앞의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뒷말은 아리송했다. 뭐가 부끄러웠단 말일까? 물소 등에 올라탄 사내아이가 대여섯 마리의 물소를 몰고 작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소 등에 올라탄 아이의 발바닥이 물에 살짝살짝 잠기며 찰박거렸다. 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았다.
“난 내가 인도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는 힌디어라곤 나마스테(안녕하세요) 뿐이야. 인도에 여러 번 왔으면서도 힌디어를 배워 볼 생각은 하지 않았어. 어디서나 영어가 잘 통하니까 그랬나봐. 그런데 좀 전에 보여준 네 모습을 보고 알았어. 사실은 내가 인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정말 인도를 좋아한다면... 찻집에서 인도 아저씨들하고 이야기하는 모습 참 멋있었어. 내가 남자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든 건 오랫만이야...”
금발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살짝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게 고백을 하고 있나?’
‘설마?’
‘근데 내용은 얼추 고백인데’
‘만난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난 보여준 것도 별로 없어.’
‘영어가 짧아 잘 못 알아듣고 있는 거 맞는 거지?’
느닷없이 자기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 했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금발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밖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왠지 슬퍼 보였다. 잠시 뒤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궁금했어. 무슨 이야기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인도 아저씨들과의 수다
1시간 전 바다미행 버스 스탠드 근처 길거리 짜이집. 수다를 떨고 있던 인도 아저씨들은 내가 ‘나마스테-’하면서 가까이 가자 ‘캄 캄’했다. 어서 오라는 격한 환영의 인사말이었다. 의자에 앉자 한 아저씨가 느닷없이 말했다.
“압꺄 나메 꺄해?”
이름이 뭐냐는 말이었다. '나메'는 'name'을 말한다. 그러니까 힌디어와 영어가 막 섞인 말이다. 나는 힌디어로 대답했다.
“메라 나메 '안' 해(내 이름은 ‘안’이에요)”
내친김에 한 마디 더 했다.
“꼬레아 쎄-훙(한국에서 왔어요)”
내 말에 인도 바야(아저씨)들이 난리가 났다.
“이 사람이 꼬레아에서 왔대, 꼬레아. 이름은 안 이래.”
그들은 자기들끼리 그 두 가지 내용을 오랫동안 공유했다. 무슨 귀중한 정보를 얻은 양 서로 주고받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전했다.
"이 사람이 코리아에서 왔대, 이름이 안이래"
그때 사내아이가 짜이를 갖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힌디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나 : 까드나 해?
꼬마 : 뻣 짜쓰.
나 : 뻣 짜스?
꼬마 : 지항, 뻣 짜스.
나 : 멩가헤?
꼬마 : ???
옆에 있던 인도 아저씨 : 네히 네히, 뻣 짜스 파이샤, 네히 루피
나 : 잉? 뻣 짜스 파이샤?
꼬마 : 뻣 짜스 파이샤
어느새 열 명도 넘는 인도 아저씨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가 힌디어로 한 마디 할 때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지러지게 웃었다. 내가 힌디어로 나눈 대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관심만 가지면 10분만 하면 배울 수 있는 말이었다.
나 : 얼마니?
꼬마 : 50이요.
나 : 50?
꼬마 : 네, 50요
나 : 너무 비싼데?
꼬마 : ???(뭐라는 거야, 이 동양 아저씨가..).
옆에 있던 인도 아저씨 : 노노, 50파이샤, 노 루피!”
나 : 잉? 50파이샤 라고?“
꼬마 : 네, 50파이샤요.“
1루피는 100파이샤다. 당시 1루피는 우리 돈으로 25원 쯤 했다. 나는 짜이 한 잔이 1루피도 안 할 것이라곤 상상을 하지 않아 꼬마가 50이라 했을 때 50루피로 알아들은 것이다. 좀 전에 버스 스탠드에서 인도 아저씨들과 나눈 대화는 내가 아는 모든 힌디어를 총동원해서 해낸 대화였다. 그 말고 내가 알고 있는 힌디어라 해 봤자 몇 개 되지 않았다.
나는 금발의 그녀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보시다시피 할 이야기가 없다) 간단한 힌디어 몇 개를 가르쳐주었다. 그것만 알아도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오지에 가도 10분 정도는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금발의 그녀는 내가 가르쳐 준 힌디말을 수첩에 적었다. 나도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배운 것이었다. 바다미에 도착할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수강생이었던 금발의 그녀를 옆에 두고 나의 힌디어 수업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