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티와의 만남
남인도에서 보기 드문 무슬림 도시인 비자풀은 무척 아름다운 전원도시였다. 도시가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데다 우뚝 솟은 모스크 말고는 눈에 띄는 높은 건물이 없어 멀리서 보면 도시라기보다 아주 큰 공원 같았다.
당시 나는 ‘인도를 이 잡듯이’라는 주제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 북도 없이(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쓴 인도 가이드북이 없었다),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다녔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머물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면 새벽에 도착했다가 밤기차를 타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하루 이틀 머물다 보면 식당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친구가 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변에 가 볼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본 뒤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바다미(Badami)란 곳이다. 바다미에 대해 내가 알아낸 정보라고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라는 것과 바다미 동굴 신전에 있는 돼지 조각상이 무척 볼만하다는 정도였다.
물어물어 바다미 행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버스 스탠드를 찾아갔다(인도에서는 버스 터미널을 버스 스탠드라고 했다). 달랑 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툭 차면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낡은 버스였다. 한국의 45인승 버스보다는 작고 25인승보다는 컸다. 출발시간이 많이 남았는지 버스는 텅 빈 채 고장 난 차처럼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 빛은 살을 태울 듯 내려쬐고 있었다. 명색이 버스 스탠드였지만 앉을만한 곳도, 햇빛을 피할만한 손바닥만 한 그늘도 없었다. 배낭을 메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버스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큰 나무 그늘을 지붕 삼은 허름한 찻집이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인도 아저씨 몇 명이 때 묻은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짜이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수다를 떨던 아저씨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한 아저씨에게 버스를 가리키며, “저기 서 있는 저 버스가 바다미 가는 버스입니까?“라고 물었다. 내 딴에는 완전한 영어 문장을 머릿속으로 만든 다음 예의 바르게 물었다. 잘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다시 인도식으로 물었다.
“(손가락으로 버스를 가리키며) 헬로우! 바다미? 바다미?”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디케 디케, 바다미 바다미”
‘디케’란 영어의 오우케이와 비슷한 말이다. 그 버스가 바다미행인 것은 확인된 셈이었다. 배가 볼록한 것이, 달마처럼 생긴 한 인도 아저씨가 빈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짜이를 한 잔 주문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금방 따끈한 짜이를 가져왔다. 맨발의 아이는 낯선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지 짜이 잔을 테이블에 놓으면서도 눈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시골이라 그런지 짜이 한 잔 값이 겨우 50파이샤였다. 우리 돈으로 13원쯤 되었다(1994년 기준). 뜨거운 한낮에 뜨거운 짜이를 마시는데 희한하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갈증도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처음 인도에 들어와서는 갈증이 날 때마다 사이다나 콜라를 사 마셨다. 당시 가게에서 사 먹을 수 있는 콜라와 사이다는 250밀리리터짜리로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보다 양이 적었다(참고로 우리나라 병에 든 사이다나 콜라는 350밀리 리터다). 그러다 보니 한 병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한꺼번에 두 병을 사서 마시곤 했다. 속이 시원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빈 병을 놓고 돌아서기 무섭게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것이 또 갈증이 났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금발의 그녀
뜨거운 짜이를 마시며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얼굴을 식혔다. 그때였다. 약간 떨어진 탁자에 등을 보인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자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서양 여자였다. 긴 머리가 어깨를 살짝 덮었고, 노란색 재킷에 하늘거리는 파란색 격자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는 시원해 보였는데 노란색 재킷은 좀 더워 보였다. 발목까지 덮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발등이 겨울 무처럼 하얬다.
여자 옆에는 60리터짜리와 40리터짜리 배낭 두 개가 서로 등을 대고 놓여 있었다. 켈커타와 뉴델리 같은 북인도 길거리에서는 자기 몸뚱아리만한 배낭을 메고 다니는 서양 여행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봄베이 이남으로 내려오자 좀체 만나기 힘들었다. 사실 봄베이 이남은 인도라기보다 동남아시아에 가까웠다. 거리도 깨끗하고 인도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거지도 없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 그랬다. 인도답지 않아서 그런지 서양 배낭 여행자들을 보기도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던 금발의 여자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여행자였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말을 걸어 보려다가 책을 읽고 있는 폼새가 워낙 진지해 그냥 보기만 했다. 한 사람은 어디 화장실에라도 갔는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뒤 주변이 어수선해 고개를 돌려 보니 운전사로 보이는 뚱뚱한 사내가 버스 쪽에서 나타났다. 정지화면 같던 버스 스탠드 주변이 순식간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버스 쪽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로 다가갔다. 곁눈으로 슬쩍 보니 금발의 그녀도 일어나 채비를 했다. 바다미행 버스를 탈 모양이었다. 친구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20대 초반의 날렵하게 생긴 차장이 내가 메고 있던 배낭을 툭툭 치면서 버스 지붕 위에 올리라고 했다. 배낭을 벗어 주자 차장은 한쪽 어깨에 배낭을 걸치더니 다람쥐처럼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사이 금발의 그녀가 내 뒤에 와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 60리터짜리 배낭과 40리터짜리 배낭이 놓여 있었다.
다람쥐 차장이 그녀의 40리터짜리 배낭을 어깨에 짊어지더니 지붕 위로 올라갔다. 내 배낭을 지고 올라갈 때 보여주었던 민첩함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배낭이 제법 무거운 모양이었다. 다람쥐 차장은 버스 지붕 끝에 여자의 배낭을 올려놓은 뒤 재빨리 내려와 60리터짜리 배낭을 멨다. 한쪽 어깨에만 팔을 끼운채 사다리를 올랐다. 좀 힘들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람쥐 차장은 사다리를 제대로 타지 못했다.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세 번째 칸에 발을 올려놓기 무섭게 배낭끈이 어깨에서 빠져 버렸다.
다행히 다람쥐 차장이 몸으로 버스 벽에 배낭을 밀어 붙이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다람쥐 차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배낭을 껴안고 내려와서는 두 팔을 모두 끼워 넣어 제대로 맨 뒤 다시 올라갔다. 나와 금발의 그녀는 다람쥐 차장의 원맨쇼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이!”
금발의 그녀가 먼저 아는 체했다. 스물네다섯 쯤 되었을까? 무척 미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화답을 했다. '하이'라고. 그러고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남자 친구는 왜 안 와?”
질문을 해 놓고 보니 여자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 프랜드?”
“저 60리터짜리 배낭 주인 말이야. 네 몸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 같은 걸.”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간 그녀의 60리터짜리 배낭과 40리터짜리 배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버스 지붕 위에서 내려온 다람쥐 차장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배낭 주인? 지금 보고 있잖아. 증명을 해야 하나?”
금발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호호호 하며 웃었다. 나는 다람쥐 차장이 쩔쩔맸던 배낭 두 개를 금발의 그녀가 혼자 갖고 다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메고 다니던 배낭도 60리터짜리였지만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오리털 침낭이었다.
“마이 네임 케티야. 만나서 반가워. 유, 인도 말 잘하더라. 좀 전에 저기서 인도 아저씨들하고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유, 일본에서 왔어?”
몰두해서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난 한국에서 왔어.”
“와우, 코리언? 코리아에 대해 조금 알아. 나이스 투 미츄, 난 프랑스에서 왔어. 일본과 코리아의 관계에 대해 알아. 일본에서 왔냐고 물어본 거 미안. 이런 시골에서 코리언을 만나다니, 무척 행운인 걸!”
자신의 이름을 케티라고 소개한 금발의 그녀는 나를 만난 것이 진심으로 반가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