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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의 음악 May 02. 2022

익명의 공간이 없는 신학교

신부를 사칭해 못된 짓을 도모하기 어려운 이유

나는 신부가 되지 못했지만 조카 중에 신부가 있다. 처가 쪽 가까운 사람 중에는 목사도 있다. 알고 지내는 스님들도 제법 된다. 그러고 보면 '종교다원주의자'는 못되더라도 '다종교주의자'쯤은 된다고 할 수 있다. 


알고 지내는 스님은 가족이 아니다 보니 자주 못 만나지만 목사님은 처가 쪽 식구라 자주 만난다. 그 목사님과 관련한 행사가 있으면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가기도 한다. 결혼 초기에는 그 목사님과 종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도 곧잘 나누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고 있다. 입장 차이가 크다는 것을 서로 알았기 때문이다.  


연일 개신교 목사들의 일탈 행위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이른바 '빤스 목사'니 해서 한국 개신교 전체가 도매금으로 '개독교'란 소리를 들을 즈음, 처가 쪽 그 목사님과 같이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신부들도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데 가톨릭 교회 차원에서 이른바 쉴드를 잘 쳐주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당시 외국에서 벌어진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릴 때이기도 했다. 


나는 신부들이 목사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윤리성은 종교와 상관없이 개인의 품성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부들이 목사들보다 조금은 더 '종교인답게' 산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답게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좀 더 윤리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그 말이 그 말인데, 그렇다면 나는 무슨 근거로 신부들이 목사들보다 좀 더 종교인답게 산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그 근거로 신부 개인의 인격이나 품성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라는 조직의 운용 형태를 들고 싶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덧보태자면 순전히 확률상의 문제다.   


3명과 100명


나는 지금 양평에 살고 있다. 양평 읍내에 가톨릭 성당은 하나뿐이다. 양평군 전체로 확대해 봤자 성당은 고작 3개뿐이다. 그에 비해 교회는 얼마나 될까? 양평 읍내에 있는 대형 교회만 해도 대여섯 개가 넘는다. 게다가 작은 교회, 상가 교회까지 합하면 모르긴 해도 수 십 군데는 될 것이다. 양평군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적어도 100군데는 넘지 않을까?  


100명이 넘는 목사들과 달랑 세 명뿐인 가톨릭 신부. 똑같은 조건에서 범죄를 저지른다고 했을 때 발생 비율로 따지면 신부는 목사들의 3%밖에 안된다. 신부들이 특별히 목사들보다 더 윤리적이라서, 또는 가톨릭 교회에서 '쉴드'를 잘 쳐주기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는 신부들이 적은 것이 아니다. 그냥 숫자가 적어 발생 빈도가 낮을 뿐이다. 


여기에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한 가톨릭 교회의 조직 운용 형태 문제다. 신부들의 세계는 익명의 세계가 없다. 이것이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범죄 발생 비율이 낮은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대개의 범죄나 물의는 익명의 공간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길에 나갔는데,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웬만해서는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한다. 따라서 범죄 발생 빈도는 그 사회의 익명화의 정도와 비례한다. 시골보다 도시에서 범죄 발생률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다. 


익명의 공간이 없는 신학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동기생들과 교구 지도 신부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일반 대학 교수들과 달리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은 학교 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연구실이 마치 작은 아파트 같았다.   


응접실에 앉아 한참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던 중, 한쪽 벽에 천연색 증명사진이 잔뜩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지명 수배자 전단지 같았다. 신부님이 딴 데 쳐다보는 사이 좀 자세히 살펴보았다. 7학년부터 1학년까지, 150여 명에 이르는 전교생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는 생년월일과 소속 교구, 출신 본당(성당)이 적혀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사진 밑에 색깔 있는 펜으로 암호 같은 표시가 되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 신부님이 유별나서 전교생 사진을 거실 벽에 붙여 놓고 취미 삼아 이름을 외우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다른 교수 신부님들 방에도 그렇게 지명 수배자 전단지처럼 전교생 사진을 붙여 놓았을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입학 때 증명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기도 했다. 


며칠밤 자고 보니 기숙사 복도 게시판에도 전교생 사진이 붙어 있었고, 이름과 나이와 소속 교구와 출신 본당이 적혀 있었다. 이 '수배자 전단지'는 각 학년 강의실 뒤쪽 게시판에도 붙어 있었다. 기숙사 곳곳에 붙어 있는 이 사진들과 신상명세는 흑백 복사본 이란 점이 신부님들의 방에 있던 것과 달랐다. 



전교생의 신상명세서가 사진과 함께 학교 곳곳에 붙어 있었다. 자연히 한 학기만 지나면 전교생의 이름과 학년, 소속 교구와 출신 성당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신학교 식당은 전교생이 동시에 밥을 먹고 동시에 마친다. 앉는 자리도 정해져 있다. 그 자리는 3주를 주기로 바뀐다. 그런 식으로 밥을 먹다 보면 한 학기만 지나면 대충 전교생의 신상 명세가 파악된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이때 요긴하게 쓰이는 것이 바로 이 '수배 전단지'다. 


방금 전까지 식탁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는데 이름과 교구를 정확히 모를 때가 있다. 그렇다고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선배라면 다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신입생들은 얼른 게시판으로 달려가 전단지를 살핀다. 그런 식으로 전교생들을 익혀 가기 때문에 1학년을 마칠 때쯤 되면 전교생의 이름과 교구, 학년은 다 알게 된다. 자연히 교류의 폭이 넓어져 방학 때면 다른 교구 선배들에게 놀러 가거나, 다른 교구 선후배들이 놀러 오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신학생들끼리 누군지 잘 몰라 서로 싸우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유대감은 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같이 7년 씩이나 신학교를 다녔으니 신부가 되고 난 뒤에도 교구는 달라도 프랜드 쉽은 아주 탄탄하다. 


군대에서 만나는 다른 신학교 신학생들


그렇다면 다른 교구 신학생들은 만날 기회가 없을까? 그건 아니다. 1차로 군대에 가서 다른 신학교 신학생들을 많이 만난다. 군인 성당은 대개 사단마다 하나씩 있다. 일요일 사단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가면 사단 내 신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복무 중인 신학생들이 10여 명 정도 되었다.  


군인 성당에서는 성탄이나 부활절 같이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미리 준비를 했다. 이때 사단 군종 신부님은 예하부대에 연락해 신학생들을 사단 성당에 모았다. 그렇게 되면 며칠씩 사제관에 묵으면서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그런 기회를 통해 다른 신학교 신학생들도 만나고, 다른 신학교 이야기도 듣곤 했다. 


5학년이 되면 전국 신학교 5학년들만 모여 며칠 동안 수련회 같은 것도 열었다. 나는 4학년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나오는 바람에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방학이나 휴학 기간을 이용해 전국 가톨릭 신학대학의 5학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데, 그래 봤자 100여 명 안팎이다. 이들 5학년들이 2박 3일 동안 먹고 자면서 함께 지내다 보면 거의 다 알게 된다. 모르긴 해도 수련회가 열리는 공간의 복도에도 '수배 전단지'가 붙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다 보니 가톨릭 신부들은 기차간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이 처음 보는 신부라고 해도 한 두 마디만 나누면 곧바로 누군지 알게 될 정도로 밀접성이 강하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는 적어도 '신부를 사칭'해 뭔가 나쁜 짓을 도모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익명의 공간이 없는 신부 사회


대한민국 1호 사제 김대건 신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된 한국인 사제는 약 6천 명이다. 이 가운데 사망한 사람이 5백 여명이고, 신부 생활을 하다가 이른바 옷을 벗고 환속을 한 사람이 약 5백 명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살아서 사제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5천 명쯤 된다는 이야기다. 


299명 밖에 안 되는 국회의원에 비하면 많은 숫자지만 특별한 '직군'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 치고는 많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가톨릭 신부들은 모두 교구 단위로 생활한다. 서울 교구나 대구 교구처럼 큰 교구는 신부들의 숫자가 수백 명이 넘지만 제주 교구나 안동 교구처럼 작은 교구의 경우 100명이 안 된다. 


한 교구 안에 100명이 안 되는 신부들이 제한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그 신부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익명성을 보장받기가 무척 힘든 것이 신부 생활이란 이야기다. 그만큼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신부 생활이다. 신부가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보다 좀 더 종교적이라고 한 내 말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신부 사회에서도 물의를 일으키는 신부들이 분명히 있다. 개인의 품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가톨릭의 경우, 물의를 일으켜 교구에서 추방을 당하면 그 순간부터 신부로서의 모든 권한과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것은 개신 교회의 목사나 불교의 승려가 물의를 일으켜 종단이나 교단에서 쫓겨난 뒤에도 개인 사찰이나 교회를 세워 계속해서 스님이나 목사 노릇을 하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것과 다르다. 실제로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 지도자들은 소속 종단이나 교단에서 쫓겨난 뒤에도 계속 종교 지도자 행세를 하면서 물의를 일으킨다. 가톨릭은 구조상 이것이 불가능하다.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가톨릭 신부들이 좀 덜 물의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개인의 품성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이런 몇 가지 외형적 이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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