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는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통해 청년들에게 들려주고싶은 이야기들을 집필했다. 책 내용 중 11장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가 유난히 감명깊었다.
19세기 철학자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에 따르면, 부(富)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써의 부는 하층계급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유한계급인 상층계급에게는 부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들에게 부에 대한 욕망은 충족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유재산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사냥의 전리품을 갖는다거나 타인의 물건을 약탈할 수 있는 것이 강자의 상징이었다면, 사유재산이 발생한 이후에는 '생산적인 노동'을 면제받으면서 부를 쌓는 것이 강자의 상징이 되었다. 생사를 건 혈투가 금전적 겨룸으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현대의 강자들은 기부를 하거나, 문화 예술에 후원을 하거나, 파티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거나 명품으로 치장하는 등 돈을 헤프게 지출하곤 한다. 유한계급은 생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부를 만인의 눈앞에서 입증하는 수단으로 소비를 선택한다. 베블런은 이들을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냥 관찰하고 기록했을 뿐이다. 이렇게 소비되는 상품들을 '베블런재' 라고도 부른다
마르크스의 세계는 투쟁과 혁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베블런의 세계는 안정과 진화로 채워져 있었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생활양식에 비해 삶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할 때 사회는 진화한다. 진화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하층계급은 이 과정을 받아들이는 압력이 약하기 때문에 진화가 빠르고, 상층계급은 비교적 버텨낼 힘이 세기 때문에 진화를 더 오래 거부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지만 상층계급의 보수적인 모습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을 자신의 딸의 나이였을 때 읽었다면 좋았을 책이라고 한다. 이 말을 10장까지 읽었을 땐 아직 이해하지 못 했었는데, 11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해가 됐다. 세상은 과거에 이렇게 돌아갔었고, 현재 이렇게 돌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돌아가겠구나.
진보 정치가들이 아무리 하층계급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도 정작 그 혜택을 받을 사람들은 그 정책을 외면하기 일쑤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치가들을 위해 기꺼이 표를 내어주는 상황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 상층계급은 당연히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상의 변화가 가득한 정책들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그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진보 정치가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되려 비판하고 비난할 때 진보 정치가들은 고민이 많아졌을 것 같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나?
이제는 이것이 자연스러움을 깨달았다. 보수성은 유한계급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인 것을. 재산이 많고 적음에 따른 것이 아닌, 단지 변화에 버티고 저항할 의지가 강할수록 보수성이 높다는 것을. 무한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도 보수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진정성을 가진' 진보 정치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멘탈을 다잡을까? 어떤 주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고민되는 밤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베블런과 같이 사회를 관찰하는 태도로 삶을 보내면 훨씬 덜 고민될 것 같다. 하지만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은 일개 시민으로써, 그처럼 관찰자의 태도로 살기는 힘들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