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 키득 Apr 26. 2020

악의 기원1

왜 에덴동산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았나

  이를 통해서 많은 물음이 나온다. 나의 질문은 이러하다. 악이 세상의 없던 것이고, 균열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악 또한 세상의 질서의 한 부분이 아닌가? 악과 죄를 통해서 하나님은 질서를 만드시는것이 아닌가?


 하와를 꼬셨던 악마에 집중해보자. 악마가 존재했었다. 스스로 타락한 자라 일컫는 이자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 자의 악마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하나님이 만든것인가? 아니면 그 또한 질서의 한 부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고통받은 이에게는 위로를 주시지만 악을 없애지는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고, 방식이다.


  고통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괴로워하거나 하나님 안에서(혹은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위로를 얻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체계 안에서는 잔인해 보이는 하나님처럼 보일 수 있겠다.  우리가 악의 구렁텅이에서 고통 속에서 울부짖을 때, 그 악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가. 그렇치 않은가. 적어도 우리의 사고체계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사실상 악이라는 개념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가. 악이란 말이 태초부터 존재했을까? 우리가 악을 가리켜 악이라 불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악이 그 개념이 하나님에게는 질서의 한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질서라는 것도 무질서가 있기에 존재한다. 흑암이 없다면 빛이 없듯이. 흑암이 없는 빛은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구분을 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악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위한 도구일 수도 있겠다.


 또한 해결할 수 있는 고통과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전자는 비교적 짧은 고통이라 할 수 있겠고, 후자는 가시지 않는 최악의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이 가시지 않는 영원한 고통의 굴레 속에 처한 적이 있는가. 다리가 짤린 자는 영원히 다리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그 고통을 대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고통을 이긴 자와 고통 속에 사는 자. 고통을 이긴 자는 어떠한가. 고통이 사라지거나 아니거나 개의치 않음을 의미한가. 그 사람은 환경에 달리 하지 않는 평안을 얻는다.


 고통 속에 있는 자는 어떠한가.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 한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환경이 달라지면 그 사람의 고통은 끝이 날까? 대부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격은 자들, 가령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 온 자들은 딥한 트라우마를 얻는다. 전쟁터에서 살아 온 군인을 떠올려보라. 병마에서 이긴 사람을 떠올려 보라. 그들의 삶은 환경이 달라진 다음에 그 고통 이전으로 돌아갔을까. 대부분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트라우마가 그들의 삶에서 흔적처럼 남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은 사람이라한들 그 이전의 삶과 같지 않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통이라는 환경이 끝이 났음에도 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고통은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환경 속에 놓인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악의 본질적 속성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 점을 간과하고 환경의 해결만을 바란다면 육의 고통은 끝나도 영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고통 속에 놓인 사람은 환경을 보기가 어렵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환경이 바뀌길 바라면서 또 그 사람의 마음이 고통을 떠나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영원한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그 속에서 걸어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우리도 위로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이해와는 다른 방식임에 분명하다. 전지전능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고통을 없애는, 환경적 장애물을 없애는 방식을 택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깊은 위로로써 존재한다.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들어서 보더라도 그의 방식은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돌맞아 죽을 위기의 부정한 이방 여인에게는 그 여인의 편에 서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셨다. 만약 고통을 제거하시는 분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여서 돌을 던질 마음을 사라지게 함이 더 편할 텐데 말이다. 아니면 이방 여인의 피부를 돌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던가. 다른 선택지가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하나님의 방식은 문제가 되는 환경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는 성경 중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다. 시편의 저자는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도움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고 있다. 기록된 바 시편의 저자는 젊은 날 적의 위협으로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겪었고, 전쟁에서 조그마한 돌맹이로 거인을 쓰러트린 자였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모든 자연만물의 해를 막으시고, 환난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의미의 하나님일까?


 내가 집중한 것은 저자가 많은 역경을 저자의 손으로 이겨냈다는 것이다. 겁에 질린, 낙담한 저자가 하나님으로 인해 그 상황을 바꾼 것인데 이때의 하나님의 개입은 직접적인 개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직접 그 상황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을 바꾸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저자가 그 상황 속에서 이겨낸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그 거인을 쓰러트리지 않으시고, 그 목숨을 위협하는 적을 없애시지 않았다. 거인은 여전히 거인이었고, 적은 여전히 저자의 목숨을 위협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무엇이 그 상황을 이길 수 있게 하였을까.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방식은 직접 개입의 형태가 아니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심으로 그 문제되는 상황을 이기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거인이 사라지고,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간단하겠냐만은 실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칫 그 직접적인 개입 한번으로 이 지구의 질서가 모조리 깨져 버릴 수 있다. 나를 위협하는 적이 하나님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면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덮쳐오는 음주음전 차량을 부셔버린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인가? 내가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은 다면 나는 인간인 것인가? 신의 가호를 충분히 받은 자인 가? 신의 가호를 받은 내가 악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때로는 한번의 개입이 많은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냉정한 하나님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조금은 다른 방식을 택하신 듯 하다. 불의한 상황,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먼저 위로하는 방식 말이다. 언뜻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통 중에 놓인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위로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상당히 어렵다. 먼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은 굉장히 예민하다. 조금이라도 툭치면 무너저버릴 듯 위태롭다. 그래서 심한 고통, 딥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 곁에서 그를 위로해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언제 괜찮아질지 모르는 상황에서(어쩌면 괜찮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서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위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존재가 있지 않은 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 하나님이다.


  고통에서 나온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벗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흉터없이 깨끗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흉터가 있다해도 전보다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가 초능력을 얻었지만 숙부를 잃어 고통 중에 헤맨 다음에 어땠는 지를 기억해보자. 그는 망가지는 대신 그를 사랑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회복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의 ‘다정한 이웃’이 되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채 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내비러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을 그 곁에 둔 것이다. 우리들이 힘들지만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줄 때에 작은 변화는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다정한 이웃이 보여주는 최고의 위로일 것이다.


    직접적인 개입을 택하지 않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끝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선택일 것이다. 죄의 문제를 들어내지 않음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택한 방식으로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 죄를 끊어내지 않고, 죄 속에서 우리와 함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때로는 절절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작가의 이전글 반려식물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