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 키득 Apr 30. 2020

악의 기원2

의인과 악인 사이


l 욥의 친구의 입장

  욥의 세친구의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으로써 권선징악, 인과응보에 관한 것이다. 욥이 생각하는 자신은 의인이지만 실제로는 죄인이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죄에 따른 징벌의 결과물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은 죄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세 친구의 위로에서 드러난 논리는 욥은 죄인이기에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이 된다.


  의인에 가까운 의로운 사람인 욥에게 과도한 징벌이 내려졌다.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닌, 의인에게 나타난 과도한 징벌, 무고한 고통에 있다.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라면 납득이 가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오차범위 없이 대쪽 같은 심판을 하는 정의의 하나님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욥의 친구들이 지적한 것도 이러한 점이었다. 친구의 고통이 안타깝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맺는 열매에 따라 하나님은 징벌과 축복을 내리게 된다. 그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이 된다.


  쿠쉬너는 이러한 관점은 고통의 원인에 집중한 것임을 지적한다. 고통이 죄에서 비롯될 수 있으나 모든 고통이 죄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인이 당하는 무고한 고통의 모순을 지적한다.


  징벌은 정의 구현의 수단으로써 사용이 된다. 따라서 징벌은 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법은 과연 완전히 옳은 것인가? 어거스틴은 ‘법이 있기에 죄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법으로 인해 죄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정한 법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법이 오용될 경우 잘못된 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에게 오차범위없는 공정함을 기대한다. 하나님이기에 늘 옳고, 참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율법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거쳐서 제정된 율법 역시 공정성 문제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에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 다는 것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게 된다.


  종교 안에서 율법에 사로잡힌 종교인들의 모습은 죄의식과 가까운 모습이다. 늘 죄인임을 인식하고,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매저키스트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이 무조건 옳은 것인 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종교적 강박감이 생기는 상황은 단순히 죄인임을 아는 것을 넘어서는 죄에 대한 압박감을 키우는 일일 수가 있다.


 징벌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악의 근원에 징벌의 하나님이 계시는 가?


l 욥의 입장

  스스로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고, 욥은 죄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삶을 돌아 봤을 때에 죄인으로 정리될 인생이 아니였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모든 자식이 죽었고, 아내가 떠났고, 막대한 부가 사라지고, 온 몸의 역창이 난 상황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징벌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아내마저 비웃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 징벌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징벌이라면 그 징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착하고, 신실한 사람이라도 상황이 변한다면 신앙이 변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옳고 선하신 하나님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욥의 생각은 변했다. 변한 상황으로 인해 욥이 물었던 것은 징벌의 이유이자 근원일 것이다. 죄는 어디서 시작됐으며, 징벌은 어디서 왔는 가?


 욥기의 저자를 통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반문은 선하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가? 욥기는 전형적인 상황을 보여주지도, 전형적인 하나님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구성 요소는 전형적이나 전혀 다르게 쓰여 지고 있다. 의인, 고통, 징벌, 하나님이라는 구성요소는 기독교 신앙관에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대게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인 죄 지은 사람은 징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집행자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욥기에서 나타난 서사는 전통적인 신앙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선한 사람이 벌을 받고,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고,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 이야기가 펼쳐 진다. 이 속에서 선한 사람이 신앙을 버리진 않았지만 고통이 멈춰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가?


 쿠쉬너는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상대성의 영역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으로 보고 있다. 의인을 향한 징벌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의인에게 내려진 징벌을 보고만 계신 거였을 까? 왜 의인의 징벌을 거두시지 않았을까?

l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는 달라지게 된다. 전능한 하나님이 가지는 이미지는 곧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한 하나님이 의인을 고통 가운데에서 구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낳게 한다.


  의인을 구하는 하나님을 떠올리면서 완전한, 전능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의인의 고통을 구하는 하나님은 질서를 무시하는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 모든 의인을 구한다면 의인을 구하면서 생기는 무질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떠올려보자, 총알이 빗겨나가는 사람들과 맞아도 죽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무적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사람이 겪는 고통이 합당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의 질서 모두를 컨트롤 하는 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연에 의한 고통도, 인간에 의한 고통도 해결이 된다. 우리는 질서를 중시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는 하나님이 있음을 알게 된다.사람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은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선택이 가능하다. 그것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악인도 있고, 선인도 있음은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선을 택했든, 악을 택했든지 세상은 그 질서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있다. 고통의 근원에 하나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양한 상황의 결과로 오늘 나에게 고통이 임했는 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질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겨놓은 여지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이다. 고통만 제거해버린다면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질서를 무질서로 만들어버린다. 대신에 고통에 놓인 사람 곁에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을 남겨 놓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선을 택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 되고, 악을 택하면 그 사람은 악인이 된다. 고통에 놓인 내가 악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택한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과 위로로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나의 선택에 관한 것 임으로 질서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좀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의 시작이 아닌, 고통에 놓인 상황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사견이기는 하나 정의의 하나님은 우리가 알 방법이 없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알 수 있지 않은 가. 나는 아는 쪽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편이다.


  고통 속에서 힘을 내기는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의 시작을 궁금해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왔는 가?‘ 라고 되묻게 되고, 때로는 권선징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외면 당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이 질서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바람이 나를 비껴가지 못하듯이, 오늘 내게 온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고통 속에 처해 있는 나와 선택하는 내가 존재한다.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고통과 위기는 늘 존재한다. 변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가 아닐까?    



이 글은 헤롤드 쿠쉬너, <왜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를 읽고 든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팔꺽이 대참사 - 삼팔이의 팔은 어디로 갔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