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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키득 May 01. 2020

이반 일리치의 죽음 - 가치의 전복

관전 포인트


  <이반 일리치의 죽음>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책의 도입부에서 이반 일리치의 부고 소식을 들은 그의 동료 관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점잖은 동료들은 겉으로는 부고 소식에 애도를 표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이 일로 인해 겪게 될 인사이동에 관해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생전의 이반 일리치가 죽음 이전에 살았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자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가 보여주는 모습은 관료사회를 살아가는 부품으로써의 인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인간이란 하나의 부품으로써 해석이 되는데 ,이반 일리치가 자신 역시 부품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이러한 자리 중심의 관료체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는 고위관직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버지와 같은 관료인이었고, 아버지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리를 확보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지방의 특별보좌관에서 예심판사로, 예심판사에서 검사보로, 검사보에서 검사로, 검사에서 더 높은 검사로 관직 이동하는 모습은 관료제 사회에서 이룬 일종의 신분상승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가 이룬 인사이동을 통해서 더 높은 자리까지 도달함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상위계층에 속한 신분이었지만 최상위계층과 파티를 즐기면서 그들과 동일시되는 기분을 누리는 모습에서 이반 일리치에게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높은 자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일종의 계층이동을 꿈꾸는 행위는 라깡이 말하는 상상계에서 보여지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인간의 욕구가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관료제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적응된 인간의 모습이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더욱 더 치열하게 자리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승진에서 처음 떨어진 날, 그가 느낀 좌절감은 오히려 더 높은 관직에 대한 열망으로 작용을 했고 치밀한 준비를 통해서 두 단계나 높은 자리를 얻게 된다. 이러한 성취욕은 그의 생활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높은 관직으로 오를 때마다 집을 키워갔던 것이다. 자신의 자리보다 더 호사로운 집을 사서 자신의 위치를 타인에게 공포한 셈이었는데 실제로 그의 경제적 위치는 그의 자리보다 낮았음을 알려준다. 더 넓은 집에서 살았지만 늘 돈이 부족했고, 가족과의 불화를 야기했다. 더 큰 케이크를 대접함으로 자신의 파티를 성대하게 만들어야 했고, 더 비싸지만 실용성은 떨어지는 염소가죽 쇼파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고급화를 부추였다.


  관료제 안에서의 성장이 삶의 만족으로 이어진 순간에 작은 사고를 당하자 이반 일리치는 기존에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의 전복을 경험하게 된다. 자리가 주는 만족감이 사실은 보여주기 식의 허례허식이었고, 본질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자리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고독과 허무함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가치의 전복의 시작점이 더 높은 자리에 오름을 축하하는 의미로 장만한 더 화려한 집에서, 사람을 부를 돈을 아끼려고 직접 집을 꾸미다가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딯히는 과정에서 생긴 고통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높은 관직의 시작이었던 그 크고 넓은 집에서 이반 일리치는 홀로 씁쓸히 죽어간다.


 죽음의 문턱에 다가갈수록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한평생 쌓아온 가치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기존의 가치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의 거부는 주변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강력한 반응은 아니다. 그저 가족들을 거부하는 모습, 의사와 동료와 같은 관료제 안의 사람들을 비웃는 등의 태도는 그저 병마와 싸우는 자의 비명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전복은 이반 일리치만의 문제였고, 주변인들은 ‘아무도 이해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은’ 문제였다.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가져올 또 다른 인사이동과 보상금 정도 밖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까운 가족과 동료에서부터 깊은 불신과 분노에 휩싸인 이반 일리치는 더욱이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든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덮친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삶과 죽음의 영역으로 사고를 확장해나간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의 원인을 찾음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가치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후반부의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도달한 지점이 어디인지 유추할 수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고통없이 사는 것이라고 자문자답하는 모습은 관료제 안에서 가진 물질 중심의 가치가 더 이상 의미없는 행위임을 곱씹고 있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회상함으로 그 답을 찾아간다. 자신의 삶이 올바랐음을 곧바로 생각함으로 자기부정의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내면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직장에서도 그의 건재함을 증명하려고 하고, 동료나 가족에게도 그의 쇠약함을 숨기려던 모습은 관료제 안에서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 적극적인 방어였다. 하지만 결국 무너진 자아는 내면에 파고들어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생의 마지막에 다다를 때에 온전히 그가 마음을 열었던 것은 자신이 평생 일구어온, 뿌듯해 마지않던 자리도 아닌, 가족도 아닌 그의 하인 게라심이었다. 가난한 하인이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죽음 앞에서 냉소적이었던 그의 마음을 풀게 만들었다.   자리보전으로 이어지는 개인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남은 자리에는 고독과 허무만이 있었고, 그를 깨달은 이반 일리치는 기존의 가치와 멀어짐을 택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자리만 남은 사람들을 향해 보여준 적대심도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생겨났다. 자신의 자리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고 맞이 한 죽음에서 역설적으로 빛을 느낀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인간의 외면을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일침을 날린다. 자리로 대두되는 물질만능주의에서 자리가 사라진 사람인 이반 일리치는 삶에 대한 반성과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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