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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키득 May 04. 2020

세탁기가 먹었어요! (상)

누구나 마음속 동화 한 편은 있잖아요.

‘누구나 마음속에 동화 한 편쯤은 있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동화는 그러하다. 동심이란 이름으로의 거창한 마음이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의 동화가 있다는 것.


동화의 가장 큰 매력은 가감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숨김없이 감정을 보이고, 마음을 거침없이 발산하는 주인공은 어떤 사건에도 침몰되지 않는다. 항상 만나게 되는 동화 속 역경에도 주인공은 굴하지 않게 된다. 어느샌가 읽는 이도 주인공의 모험에 합류하고 자연스럽게 젖어들어간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꾸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해맑은 이야기와 주인공은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가게 만든다. 사물과 친구가 되게 하기도 하고, 별거 아닌 일상 속에서 대단한 모험을 하게 만든다.


나의 동화 이야기

대학교 시절에 종종 보던 영국 시트콤이 있었다. 동기 녀석이 추천해줬던 시트콤이었는데 보자마자 인생 시트콤으로 생각할 만큼 나를 사로잡았다. 제목은 ‘블랙 북스’이다.


괴팍하기 짝이 없는 버나드 블랙은 작은 책방의 주인이다. 정작 책방을 운영할 마음이 전혀 없는 이 버나드는 찾아오는 손님을 냉대한다. 전화 중이던 자신에게 책의 가격을 묻는 손님한테는 포스트잇에 거칠게 ‘phone!’이라고 적어서 이마에 붙인다. 친절이라고는 dna에도 없는 듯한 이 괴짜는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안하무인에 독불장군 같은 버나드에게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옆집에서 자위기구 같은 라이터를 파는 프랜과 세무 일을 싫어하는 전 세무사, 현 블랙 북스 직원인 매니였다. 사실 유유상종이라 하지 않는 가, 이 둘도 만만찮다. 이 세명이 이끌어가는 작은 단막극 같은 시트콤을 참 좋아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프랜의 동창회 에피소드이다. 프랜이 동창회를 싫어하고 있고(프랜의 배경을 보고 유추한 것이다), 그 동창회는 곧 파멸의 길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버나드의 예언을 비웃은 프랜이 하나 제안을 한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자는 건데, 버나드는 동창회가 망한다에 한 표를 걸고 프랜은 버나드와 매니가 동화를 만들지 못할 것에 한 표를 걸게 된다.


이 둘의 내기가 펼쳐지는데 아주 가관이다. 프랜은 초반에 극도의 화기애애를 보여주다 곧 화기애애만큼 불붙은 폭로전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버나드와 매니는 그럴듯한 동화를 한 편 써낸다. 풍선을 찾아다니는 아기 원숭이가 풍선을 되찾고, 동물 친구들과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끝이 나는 이 동화는 삽화까지 마칠 정도로 완성도 있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동화의 흥행을 상상하다 고주망태가 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이 유명세 때문에 망가질 두려움에 급기야 동화를 없애버리기로 한다. 결국 버나드와 프랜은 사이좋게 돈을 나눠가진다.


이 에피소드를 본 나는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 둘이 술기운에 만든 동화가 꽤나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다. ‘나도 만들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야기 작업에 착수해버린다.


나의 동화 작업기

이 말도 안 되는 동기로 나는 동화를 썼다. 글감은 자꾸만 없어지는 양말이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나의 양말 컬렉션은 희한하게도 한쪽만 없어졌다. 신을만하면 사라지는 양말 한쪽 때문에 꽤나 골이 골렸던 기억이 났다. 심지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같은 색깔의 양말을 열 켤레나 샀었다. 그런데도 양말의 짝은 맞춰지지 않았다. 각 잡힌, 쫀쫀한 양말을 신고 시작하는 하루의 상쾌함을 아는 자는 알리라. 이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그때 생각했다.


‘그래! 세탁기가 먹은 거야!’


그렇게 내 동화는 탄력이 붙었다. 땡땡이 양말을 좋아하는 현빈이는 나들이에 신을 땡땡이 양말이 사라지자 크게 실망한다. 집안 곳곳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땡땡이 양말에 엄마가 한마디 한다.


‘그래! 세탁기가 먹은 거야!’


나의 경험을 담은 이 이야기는 현빈이와 세탁기의 설전으로 절정에 치닫고, 욕심쟁이 세탁기가 온 집안에 양말을 다 먹어치워서 배가 터짐으로 끝이 난다.


이야기가 완성이 되자 참으로 흐뭇했다. 벌써 동화 한 편이 완성된 듯싶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삽화와 함께 완성된 동화가 있었다. 이제 현실로 동화를 부를 차례였다.


하지만 나의 동화 방랑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새싹 동화작가는 이미 동화 한 편을 가슴에 안았지만 누가 알았겠나! 그것이 거대한 여행의 시작이었음을!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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