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일기
이사는 사람에게도, 식물들에게도 고단한 일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싱고니움과 초설 제외)은 잘 적응했고, 겨울도 잘 났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친구들은 환경의 변화를 몸통 그대로 받은 친구의 이야기이다. 이사를 올 때에 나는 택시를 잡아서 식물들을 먼저 옮겼다. 이사 갈 집에 먼저 가서 식물들을 조심스럽게 옮겨놨었다. 이사 동선을 생각해 화장실에 옮겨놓았는데 밖에 빼놓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차선의 선택을 했었다. 불안했지만 출근을 했고, 돌아오니 집은 난장판이었지만 대강의 구조는 잡혀있었다.
오자마자 식물들을 살폈다. 대부분 아이들은 옮겨놓은 그대로였지만 꼬부랑 선인장이 반토막 나있었다. 순간 짜증이 몰려왔지만 진정하고,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살리리라’ 사뭇 진지하게 빈 화분에 반토막 난 아이를 옮겼다. 이후의 몫은 자연에게 맡겨야 한다.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줬으니 사느냐 죽느냐는 이제 작디작은 꼬부랑 2호에게 맡겨야 했다.
꼬부랑 1호와 2호의 추후를 살피는 동안 다른 새끼 선인장 하나가 흙으로 돌아갔다.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갔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굳세게 변한 환경에 잘 적응해나갔다.
몸통에 해당되는 꼬부랑 1호의 잘린 자리에서 팔하나가 나왔다. 또 다른 생명의 태동에 감동이 밀려온다. 잘린 부분이었던 꼬부랑 2호도 잘 자라고 있었다. 그래도 꼬부랑이들을 살려서 기분이 좋았다. 또 한 번 선인장의 끈질긴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잘려 나가도, 팔이 떨어져도 살아남는 선인장을 보면 묘한 감동이 일렁인다. 척박한 환경에도 뿌리를 내리는 그들의 생명력은 연약한 나보다도 더 강인했다.
꼬부랑이들의 새 이름
어느정도 자리를 잡자 꼬부랑 1호와 2호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기로 한다. 이전의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리 세심하지 못하다. 용심목이처럼 품종이 이름이 되기도 하며, 긴 팔이처럼 그 형태에 착안해서 간헐적으로 이름을 주어준다. 하지만 대부분 이름 없이 키운다. 이름 자체에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 탓에 그냥 눈 앞의 식물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 식물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르면서 좀 더 나의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그 대상을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애정을 갖는 행위이다.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저기’라고 부를 때와 ‘땡땡아’라고 불릴 때의 느낌은 다르다. 신기하게도 이름이 생길 때에 많은 것들 중에 구별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좀 더 살갑게, 좀 더 사랑이 담긴 생장 라이프를 위해서 꼬부랑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어떤 이름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나의 네이밍 센스는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꼬부랑이들을 바라보면서 직감적으로 생각나는 것을 이름으로 하기로 한다. 바로 ‘직선’과 ‘곡선’이다. 뿌듯하다.
직선
조그마한 팔이 나온 직선은 약간의 생장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팔이 ‘뾱’ 나온 이후로 팔이 약간 자란 것 말고는 별 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몸통의 생장이 팔의 생장으로 넘어간 것이라 생각이 된다. 훌륭히 잘 자라고 있다. 흐뭇하다.
곡선
곡석은 약간의 우려가 된다. 우려의 이유는 너무 인사성이 바르다는 것이다. 한번 시작된 인사는 멈출 생각이 없다. 처음 꼿꼿했던 자태는 점차 인사성을 갖춰가더니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너무 겸손한 곡선은 순례의 길이라도 떠난 양 하루하루 더 겸손해지고 있다. 그의 인사를 멈춰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의 순례를 존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