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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렌더 이야기꾼 May 11. 2020

정독도서관 가는길

도서관 가다가 떠올린 나의 노후



정독도서관으로 갔다. 과제에 필요한 책이 있었는데 사기는 뭐했다. 대부분은 중고도서로 사거나 빌려서 해결하고 있었는데, 존 힉의 <종교철학>이라는 책은 이미 오래전 절판이 되었고 중고가로 65,000원에 올라온 책이 유일했다. 차마 65,000을 주고 사기는 뭐해서 도서관을 다 뒤져봤다. 집 근처 도서관은 물론이고, 왠만한 도서관에서도 없는 책이었다. 그러다 정독도서관에 있다는 소식에 쉬는 날인 오늘 후다닥 간 것이었다.


아침 일찍 갔다가 오후 내내 집에서 쉬려고 했었다. 하지만 느즈막에 떠진 눈에 여유를 가지고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점심 겸 아침을 먹고, 종로로 갔다. 점심을 막 지난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은근 있었고, 연 가게들도 많았다. 코로나가 슬금슬금 수면 위로 오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햇살은 맑았고, 무엇보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동네마다 꽃들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동네만에 정서를 만드는 한 부분인 것 같은데 아마도 꽃에 대한 관심이 요즘 들어 높아져서 인 것 같다.



길을 걷다 보니 낯이 익었다. 오래전에 간 적이 있던 독립영화관도 있었고, 또 언젠가 반가운 얼굴들을 보러 갔던 동네였다. 심지어 ‘이름이 정독이 뭐냐’라고 생각했던 정독도서관도 간 적이 있었다.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망각에 온 몸이 노출된 사람 같다. 기억을 정말 못한다. 잊어버린 채 사는 것이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친한 친구의 생일도 기억을 못하고, 심지어 내 생일도 까먹을 때가 많다. 여러모로 나에게 서운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어찌됐든 동네를 급한 일없이 걷다 보니 이름 모를 식물들과 알았지만 잊어버린 꽃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연신 사진을 찍어 댔다. ‘아이고, 예쁘네’하는 모양새가 꼭 노인네 같다. 사실 나는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모양새이다.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끔씩 천천히 하는 산보가 더 좋고, 사람 없는 곳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 사람 없는 도서관이 제일이고…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다 보면 꼭 뽐새가 노인네 같다. 친구들하고 만나서 곧잘 놀 때도 있지만 이내 에너지가 소진되어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책 읽는 것이 좋고, 혼자 영화보는 것이 좋고(사람에 따라서 최대 셋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조용히 식물보는 것을 좋아한다.


길에 핀 꽃이 자꾸만 눈이 들어 걸음을 멈추다 보니 도서관이 보였다. 도서관이 특이하게 건축된 듯 싶었다. 입구에서 온도를 재고, 손 소독제를 바르면서 ‘쭉 가다 보면 2층이 나온다…’ 진행원의 설명을 반쯤 까먹고 있었다. 하지만 쭉 가다가 나온 어학뭐시기실에서 도서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마포구평생교육원으로도 빌릴 수 있다고 해서 따로 발급은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에 두고 온 탓에 온라인 회원증으로 빌렸다. 총 두 권을 빌렸는데 하나는 앞에서 말한 <종교철학>이고, 하나는 셀린의 <밤의 끝까지의 여행>이다. 오래 전에 알게 된 책인데 제목이 참 낭만 있다 여겨져서 꼭 읽고 싶었다.


그렇게 두 권을 빌려서 나왔다. 도서관 안에 작은 공원에서는 벤치가 잔뜩 있어서 서울의 삶을 잊고 정취 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그 풍경에 취해서 책을 읽어볼 까 했다. 벤치 하나를 골라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종교철학>은 나 같은 똥멍청이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열심히 흩어진 이해를 잡고 있을 때 발 끝에서 하얀 물체, 회색 물체가 보였다. 비둘기였다. 겁도 없이 자꾸 내 쪽으로 오는 그것들은 무법자였다. 발도 힘없이 내쫓아보았지만 싸인이 맞지 않았는지 내 발 쪽으로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다행히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나의 가방은 아직 벤치 위에 있었다. 책을 든 채, 그것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것들은 왠만한 상황에서는 날개를 쓰지 않는다. 그저 공격적으로 걸어갈 뿐이다. 벤치를 지나간 그것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재빠르게 짐을 챙겨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서 나는 나의 노후를 떠올려 봤다. 사실 나의 미래처럼 무에 가까운 것이 없다. 미래를 떠올릴 때에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후의 햇살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는 데 종종 멈춰서 꽃 사진을 찍는 나를 발견하니 나의 노후가 그려졌다. 도서관이 있는 동네에 집을 마련해 책을 읽고, 쓰면서 하릴없이 식물을 돌보는 그런 삶. 딱 이었다. 물론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속도의 인생이지만 어쩐지 나와 꼭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안국은 참 괜찮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동네의 시세를 생각해서 앞으로 열심히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동네는 매력적이지만 비싸다. 나의 노후를 위해서 오늘도 나는 시끄럽고 우당탕당하는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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